[북극 탐험]“사방에서 끼익 끼익…얼음이 무너져내린다”

  • 입력 2005년 5월 5일 18시 5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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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꽃 가시밭길대원들은 쉴 때도 서 있었다. 얼음 표면에 눈이 얼어붙어 꽃이 핀 듯 아름답다. 그러나 대원들에겐 장애물. 썰매가 걸려 잘 미끄러지지 않기 때문이다.
눈꽃 가시밭길
대원들은 쉴 때도 서 있었다. 얼음 표면에 눈이 얼어붙어 꽃이 핀 듯 아름답다. 그러나 대원들에겐 장애물. 썰매가 걸려 잘 미끄러지지 않기 때문이다.
《# 4월 2일(원정 25일째·북위 85도22.265분·257.75km)

저절로 욕이 나온다. 어제 대빙(큰 얼음판)이 보여서 이제 편할까 싶었는데 빌어먹을 ‘깨몽’. 다시 난빙의 연속이다. 오늘 죽어라 올라왔는데 7분을 채 못 왔다. 웬 유빙은 그렇게 심한지. 사방에서 끼익∼끼익∼ 소리가 난다. 20m는 족히 돼 보이는 난빙이 무너진다. 희준이는 중간에서 낙동강 오리알이 됐다가 겨우 탈출했고 우리도 무너져 내리는 곳을 육탄 공격으로 넘었다….

세계 최초로 산악그랜드슬램을 달성한 박영석(朴英碩·42·골드윈코리아 이사, 동국대 산악부 OB) 탐험대장. 3월 9일 캐나다 레졸루트의 베이스캠프를 떠난 그는 5월 1일 북극점을 밟을 때까지 54일 동안 이틀을 빼고는 매일 일기를 썼다. 공책 절반 크기의 수첩에 깨알 같은 글씨로 빼곡히 적혀 있는 원정일기. 여기엔 그의 희망과 절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박 대장의 처절했던 54일간을 발췌해 소개한다.》


#3월 10일(원정 2일째·북위 83도11.26분·12.1km)

‘KOREA’ 이정표
박영석 탐험대장이 북극점 도착을 기념하는 팻말을 꽂고 있다. 북극점에서 한국까지 5830km라고 표시된 게 눈에 띈다.

초장부터 난빙이다. 아무 말 없이 루트를 찾아 나서고 대원들 역시 아무 말 없이 뒤쫓아 온다. 이그. 이게 마지막이다. 이 짓을 왜 할까? 두 번 다시 오면 개다. 별의별 소리를 지껄이며 간다. 8시간 운행 동안 2번 간식 시간을 빼고는 계속 운행을 했지만 이동거리는 고작 6.1km. 암담하다. 오늘 스무 번도 더 넘게 벨트를 풀고 맸다. 운행복이 안 마른다. 낭패다.

# 3월 15일(원정 7일째·북위 83도30.425분·50.62km)

3번째 리드가 크다. 왼쪽으로 건널 곳을 찾아 리드를 따라 내려간다. 살짝 얼어 있다. 들어가 밟는 순간 쑥 들어간다. 화들짝 놀라 옆에 있는 얼음덩어리를 잡고 간신히 기어 나왔다. 허리까지 빠졌다. 빌어먹을…. 그래도 이 리드는 건너서 텐트를 치고 싶다. 2년 전 리드를 건너려다 물에 빠져 그곳에 텐트를 쳤더니 다음 날 500m 이상 벌어져 4, 5일을 못 건너고 기다렸잖은가. 다시 왼쪽으로 가 건널 곳을 찾다가 또 얼음이 깨져 빠졌다. 가슴까지 들어갔다 나왔다. 그래도 악으로 깡으로 리드를 건너서 텐트를 쳤다. ××.

# 3월 23일(원정 15일째·북위 84도13.09분·129.64km)

“무지하게 지친 하루다”
박영석 탐험대장의 원정 일기. 그는 원정 기간 54일 동안 이틀을 빼고는 꼬박 일기를 썼다. ‘오늘 무지하게 지친 하루다’로 시작하는 4월 29일의 일기
힘들다. 이제 나도 나이를 먹었나 보다. 마흔셋이면 적지 않은 나이다. 대원들에게 이런 저런 이유를 대고 1시간 앞당겨 텐트를 치고 싶었으나 참았다. 나 자신과 타협하는 순간 원정은 끝이다. 마음을 다잡고 다시 시작하자. 그래도 힘들다. 동상에 걸린 상처가 아프다. 이곳에서 자유를 찾고 싶었는데…. 자유? 한낱 사치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이 모든 상황을 극복하기에도 내 정신이 모자란다. 잠이 그립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립다.

# 4월 11일(원정 34일째·북위 86도34.027분·390.66km)

북동풍이 이틀째 계속 분다. 막내는 발가락에 동상이 와서 감각이 없단다. 11시 30분 텐트를 칠까 하다가 가는 데까지 가보자 마음 먹고 다시 출발했다. 한 발 한 발 내딛는 게 내 의사와 상관없다. 그래야만 갈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의지를 찾는 것은 고양이 앞에 생선을 놓고 고양이가 얼마나 참나 테스트하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의지? 개나 줘버려라. 무조건 가야 한다. 목표가 있으니 걷는다. 꿈과 목표 없이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최악의 자연 조건 속이지만 꿈이 있고 목표가 있다는 것은 행복한 것 아닌가?

# 4월 22일(원정 45일째·북위 88도9.293분·567.08km)

성냥개비 생일상
지난달 21일 홍성택 대원의 40회 생일을 맞아 차린 생일상. 조그만 케이크에 성냥 4개로 초를 대신했다. 박영석 탐험대장은 이날 감춰뒀던 맥주를 꺼내 대원들을 감격시켰다.
오후 5시 운행 정지. 오늘은 성택이 생일이다. 그동안 몰래 지고 온 맥주와 과일을 성택이 생일 선물로 내놓으니 감격해 한다. 북위 88도에서 맥주와 신선한 과일이라니. 비록 꽁꽁 얼었지만 감격할 만하지. 나도 대원들 몰래 갖고 오느라고 죽을 고생했다. 대원들이 신이 나서 먹는 것을 보니 기분이 좋다. 대장 아무나 하는 거 아니다. 이런 사소한 것까지 챙겨야 한다. 대장은 역시 힘들다.

# 4월 30일(원정 53일째·북위 89도52.471분·758.16km)

날씨가 험악해졌다. 극점의 마지막 저항인가. 북위 90도 근처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난빙의 연속이다. 블리자드에 화이트아웃까지…. 거기다 리드까지 많다. 오후 4시경 찬일이가 뭘 봤는지 허겁지겁 뛰어간다. 앞을 보니 성택이 썰매는 보이는데 성택이가 보이지 않는다. 또 리드에 빠졌다, 썰매 줄에 매달려 있다. 아이고, 10년 감수. 얼음판이 동쪽으로 밀려 일부러 서북쪽으로 방향을 잡고 이동했다. 내일은 북극점에서 마지막 북극 일기를 썼으면 좋겠다. 인샬라, 아멘, 관세음보살….

#5월 1일(원정 54일째·북위 90도00.000분·772.12km)

드디어 마지막 별을 땄다.(박 대장은 너무 가슴이 벅차 이 말밖엔 쓸 수 없었다고 했다.)

정리·사진=전창 기자(레졸루트) je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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