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데이트]베토벤 소나타 32곡 모두 녹음도전 백건우씨

  • 입력 2005년 5월 5일 18시 4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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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 같아요.”

전화기 저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느긋했다. ‘건반 위의 구도자’ 피아니스트 백건우(59) 씨. 그는 부인인 배우 윤정희 씨와 함께 영국 웨일스의 한적한 전원도시 몬무스에 머무르고 있다.

“너무 아름다운 곳이에요. 풀밭에 온갖 꽃이 피어나고 토끼가 뛰어다니고 저만치 사슴도 지나가고…. 더할 나위 없죠.”

그는 그 한적한 곳에서 피아니스트 일생을 건 도전에 나섰다. 4월 30일, 그 곳의 녹음스튜디오 ‘와이어스톤 홀’에서 ‘피아노 음악의 신약성서’로 불리는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전곡(32곡) 녹음에 착수한 것. 1차로 8일까지 소나타 16∼26번을 녹음해 영국 명문 음반사인 데카 레이블로 9월에 CD 3장을 발매하고, 이어 2007년까지 10장을 완성한다. 현역 피아노 대가 중 이른바 ‘메이저급’ 음반사에서 베토벤 소나타 전곡을 녹음한 사람은 다니엘 바렌보임, 알프레드 브렌델, 리처드 구드 등 손에 꼽을 정도다. 피아니스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다고 비교할 수 있는 대도전이다.

8번 ‘비창’, 14번 ‘월광’, 23번 ‘열정’…. 뜨겁게 끓어오르는 격정에서 고요한 내면의 평화까지,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가 그려내는 세계는 한없이 다채롭다. ‘구도자’라는 백건우 자신의 별명에 어울리는 작업 같다. 그 자신은 베토벤을 어떻게 생각할까.

“나는 거대한 비전에 잘 사로잡히나 봐요. 큰 화폭의 그림에 압도되는 것처럼… 바로 베토벤 소나타의 세계가 그래요.”

그는 미국 줄리어드 음악원에서 과제곡으로 베토벤을 공부할 때는 딱 집어낼 수 없는 불편함을 느꼈다고 한다. 자신이 이해하기 힘든 세계인지도 모른다고 회의했다. 그러나 이제는 알게 됐다는 것이다.

“베토벤이라는 작곡가는, 연주가 스스로 자신에 대한 믿음이 어느 정도 생겼을 때에야 제대로 접근할 수 있는 존재였던 거죠.”

이제 그는 그런 믿음을 얻었을까. 대답 대신 얼굴 가득한 미소가 전화기 저편에 보이는 듯했다.

“베토벤이 쓴 32곡의 피아노 소나타는 일종의 자서전이에요. 인생의 각 단계가 그렇듯, 그 안에는 평화와 명상도 있고 격정과 돌풍도 있죠. 그런데 이 자서전을 들여다보면 전 인류의 이상과 고뇌가 보이는 게 기막히죠. 한 인간이 그렇게 많은 것을 표현할 수 있다는 건… 문학으로 치면 셰익스피어에 비견할 만하죠.”

프랑스 파리에 30년 넘게 살며 프랑스 국가공로훈장(2000년)과 최고영예의 음반상인 황금 디아파종상(2002년)을 수상한 그를 사람들은 부러워한다. 그의 부인이 1970년대 한국적 여성미의 심벌이었다는 점에도 ‘질투’가 따른다. 그 자신은 어떻게 생각할까.

“감사할 뿐이죠. 얼마 전에는 프랑스 루아르 강변의 한적한 고성(古城)에서 베토벤 소나타를 세 곡 쳤어요. 청중도 몇 안 되는 호젓한 콘서트였지만 무척 행복했어요. 그러나 순간의 행복보다도 삶을 재미있게 만드는 일은 이번 녹음과 같은 ‘도전’이에요.”

잠시 머뭇거리다 그는 확신에 찬 한 마디를 보탰다. “그런 도전까지 허락받았으니 행복한 삶이죠.”

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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