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 기행]헌릉 의릉 홍릉 유릉 개방

  • 입력 2005년 5월 5일 18시 4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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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부터 산책로가 개방된 헌릉(왼쪽)과 의릉(가운데),그리고 유릉(오른쪽)의 석물. 김미옥 기자 동아일보 자료 사진
1일부터 산책로가 개방된 헌릉(왼쪽)과 의릉(가운데),그리고 유릉(오른쪽)의 석물. 김미옥 기자 동아일보 자료 사진

조선시대 왕릉을 걸어 보자. 둥근 봉분(封墳)과 그 주변의 다양한 돌조각(석물·石物)을 감상하고 푸른 잔디와 울창한 숲을 거닐면서 역사를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때마침 1일부터 태종과 원경왕후의 무덤인 헌릉(獻陵·서울 서초구 내곡동·사적 194호), 경종과 선의왕후의 무덤인 의릉(懿陵·서울 성북구 석관동·사적 204호), 고종과 명성황후의 합장무덤인 홍릉(洪陵) 및 순종 순명황후 순정황후 3인의 합장무덤인 유릉(裕陵·이상 경기 남양주시·이상 사적 207호)의 주변 산책로가 개방됐다.

헌릉 의릉 홍릉 유릉을 중심으로 조선시대 왕릉을 찾아가 본다.

▽조선시대의 왕릉=조선시대 왕과 왕비의 무덤은 능(陵), 왕의 생모나 왕세자 왕세자빈의 무덤은 원(園), 대군이나 공주의 무덤은 묘(墓)라고 불렀다.

조선의 왕릉은 모두 44곳. 왕은 27명이었지만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후에 왕으로 추존(追尊)된 인물과 왕비의 무덤까지 합한 것이다. 서울 경기 강원과 북한의 개성시에 있다.

헌릉이나 의릉처럼 왕릉의 이름은 기본적으로 두 글자다. 그러나 초대 왕이었던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健元陵·경기 구리시)은 유일하게 세 글자다.

왕과 왕비의 무덤은 대부분 한곳에 좌우로 봉분을 배치해 같은 이름을 부여받는다. 그러나 태조의 경우엔 태조와 왕비 2명의 무덤이 각각 다른 곳에 조성됐다. 왕비 신의왕후의 무덤은 제릉(齊陵·개성), 계비인 신덕왕후의 무덤은 정릉(貞陵·성북구 정릉동)이다. 단종과 중종의 경우도 왕과 왕비의 무덤이 두세 곳에 흩어져 있다. 그리고 홍릉과 유릉처럼 합장무덤인 경우도 있다.

▽좌우 봉분의 헌릉, 상하 봉분의 의릉=헌릉과 의릉은 봉분의 배치에 있어 대조적이다. 헌릉은 태종과 원경왕후의 봉분을 좌우에 조성한 것으로, 조선시대 왕릉의 기본적인 배치 구조를 보여준다. 고려 공민왕과 노국공주 무덤의 배치를 따른 것이다.

반면 의릉은 경종과 그의 계비인 선의왕후의 봉분을 좌우가 아니라 상하로 조성했다. 이 같은 특이한 배치는 조선시대 왕릉 가운데 유일하다. 이것은 풍수지리상 땅의 기운을 다스리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20세기 홍릉과 유릉의 변신=홍릉은 고종이 승하한 1919년, 유릉은 순종이 승하한 1926년에 조성됐다. 대한제국기 고종과 순종은 황제라 칭했다. 그래서 황제의 무덤으로서의 위엄을 갖추려 했다.

우선 문인석 무인석을 3∼4m로 크게 만들어 위용을 나타냈다. 동물 조각의 경우 이전에는 말 양 호랑이 등이었지만 홍릉 유릉에 이르러 기린 코끼리 해태 낙타 등으로 그 종류가 다양해졌다. 그리고 이들을 도열하듯 두 줄로 배치함으로써 황릉으로서의 위용을 보여주려 했다.

홍릉과 유릉의 석물 사이엔 차이점도 있다. 유릉의 문인석 무인석은 홍릉에 비해 사실적이다. 1926년 당시 근대 조각 수법이 반영된 것이다. 홍릉의 동물 조각은 다리 사이가 막혀 있는데 반해 유릉의 동물 조각은 다리 사이가 뚫려 있는 것도 흥미로운 차이점이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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