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고승철 칼럼]‘거품 근무’를 줄이자

  • 입력 2005년 5월 3일 18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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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예산처 공무원들은 요즘 오후 9시 반이 지나면 퇴근 준비에 바쁘다. 오후 10시 정각에 어김없이 사무실 전원이 끊어지기 때문이다. 등이 꺼지고 컴퓨터도 작동되지 않는다.

‘강제 퇴근’을 단행한 이유는 업무효율성을 높이고 직원들이 가정생활에 충실하도록 하기 위해서란다. 그전에는 예산처의 업무 특수성 때문에 밤 12시를 넘겨 일하는 게 다반사였다. 직원들은 심야근무에 대비해 저녁식사도 느긋하게 하는 편이었다.

‘10시 소등제’가 실시된 후엔 구내식당에서 저녁밥을 얼른 먹고 업무에 집중하는 직원이 늘어났다. 이튿날 낮에도 업무집중도가 높아졌다. 과거엔 직원 대부분이 수면 부족으로 낮엔 피로감에 시달리다 밤이 되면 활발해지는 ‘야행성’ 체질이었다.

예산처 공무원의 가족들이 새로운 근무제를 누구보다 반기고 있다. 가장(家長) 얼굴을 잠시나마 보고 잠자리에 들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신혼(新婚)의 사무관은 심한 죄책감에서 약간 벗어날 수 있게 됐다.

▼늦은귀가에 가족대화 단절▼

한국에서는 적잖은 화이트칼라 직장인들이 일 때문에 가정생활을 희생당하고 있다. ‘칼 퇴근’을 할 수 없거나 퇴근 이후에도 접대 자리에 앉아야 하는 이들이 수두룩하다. 생산직 근로자처럼 특근수당을 일일이 챙길 수도 없다.

기업에서 기획파트나 비서실 직원 대다수는 비상근무에 밤낮으로 시달린다. 저녁 무렵에 툭 던져지는 과제 때문에 밤을 새우는 일이 어디 한두 번이랴. 또 일부 과제는 열심히 한다 해서 해결책이 보이는 게 아니다. 예를 들어 회사가 추진하는 사업에 정부 규제가 걸려 있으면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유력자를 찾아내 그와 접촉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영업담당 임직원은 거래처 사람들을 접대하기 위해 과도하게 시간 돈 몸을 쓰고 있다. 상당수 거래는 여전히 접대시간에 술잔을 기울이며 ‘한국식 신뢰관계’가 형성된 후에야 성사된다. 하다못해 TV홈쇼핑 채널에 자기 회사 상품을 황금시간대에 소개하기 위해서도 홈쇼핑 관계자 가운데 학연 지연 혈연이 걸리는 사람이 있는지를 먼저 살핀다고 한다. 이러니 만약을 위해 동창회 향우회 모임에 부지런히 얼굴을 내밀 수밖에 없다.

대부분의 직장에서는 회식이 잦은 편이다. 회식이란 공동체 의식을 높이고 진솔한 대화의 기회를 갖는다는 면에서 장점이 많다. 그러나 지나치게 잦다 보면 조직과 상사에 대한 불평을 터뜨리는 장(場)이 되기 십상이다. 과음 과식으로 이어지면 비용과 시간 낭비, 건강 손상, 이튿날 업무효율 저하 등 피해가 막심하다. 또 가장의 늦은 귀가 때문에 빚어지는 가족과의 대화 단절은 가정 파괴로 이어질 수도 있다.

자녀가 다니는 학교에 가 본 아버지가 얼마나 될까. 초중고교 12년간 한번도 가지 않은 아버지가 대부분이리라. 갔다고 하더라도 졸업식이나 입학식 때가 아닌가. 공개수업 참관은 으레 어머니 몫이다. 선진국에서처럼 아버지가 하루 휴가를 내 수업 진행에 자원봉사자로 참여하는 광경은 한국에서는 거의 볼 수 없다. 아버지들은 공교육의 문제점에 대해 성토하지만 학교 현장이 어떤지 알지 못하기에 공허한 대안만 이야기한다.

선진국 사례를 자꾸 들먹여 민망하지만 자녀가 부모 직장을 방문하는 것도 한국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일이다. 부모가 무슨 일을 하는지, 직장에서의 애환은 무엇인지 직접 일터를 찾아가 확인하면 서로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는데….

▼부모일터 자녀에 보여주면…▼

한국에서도 일부 대기업이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가사불이(家社不二)’ 등을 내세우며 임직원 가족을 위한 다양한 행사를 벌인다고 하니 반가운 소식이다. 각 직장에서는 ‘거품’ 근무 때문에 직원들의 몸과 시간이 훼손되지 않는지 잘 살펴야 한다. 거품을 줄이면 조직의 성과가 올라가고 조직원 개인의 행복지수도 높아지지 않을까.

고승철 편집국 부국장 che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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