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정초신]블로그서도 아름다운 사람 만나고 싶다

  • 입력 2005년 5월 2일 18시 2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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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문화의 화두는 ‘켜진 세계로의 진입’이다. 회사에 들어서 자리에 앉는 순간 켜진 세계로 진입하기 위해 허겁지겁 버튼을 누른다. 모니터가 밝아지고 수많은 정보의 바다로 발을 담그는 순간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밤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기 위해 책상 위에 놓인 신문을 펼치는 대신 검색엔진을 클릭한다. 생각나지 않는 단어를 찾기 위해서도 결코 사전을 뒤적이지 않는다. 전력을 공급해야만 켜지는 비실존의 세계가 실존의 세계를 꺼진 세상으로 정의하면서 인간이 향유하는 문화의 코드도 비실존을 받아들여 버렸다.

비실존 문화의 화두는 웅변하는 소수의 극단적인 전사화(戰士化)이다. 꺼져 있는 세계, 즉 오프라인 세상에서는 그것이 아무리 강력한 진실이라 해도 침묵하는 다수를 웅변하는 소수가 제압하지 못했지만 켜져 있는 세계에서는 가능해졌다. 실명보다 익명으로 더 강력하게 존재하는 비실존의 공간에서 웅변하는 소수는 시시각각 자신의 모습을 바꾸어 끊임없이 의견을 표출함으로써 세력을 키워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보이는 적보다 보이지 않는 적이 얼마나 더 강한지는 삼류 전쟁영화만 봐도 알 수 있는 진실이다.

블로그 폐인의 생활을 시작한 지 1년이 넘어간다. 이 칼럼을 쓰게 된 것도 블로그 이웃의 소개를 통했을 정도이니 켜진 세상의 파워에 숨이 막힐 뿐이다. 처음 블로그라는 것을 시작할 때에는 살아 있는 세상이 죽어 있는 세계에 밀리고 있는 사실을 안타까워했다. 먹고 마시고 숨쉬는 진짜 세계는 오프라인, 꺼진 세상이라 말하고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모니터로만 보이는 죽은 세계는 온라인, 켜진 세상이라 표현하는 것에 코웃음을 쳤었다.

그러나 블로그 생활 1년이 지난 지금은 사고의 틀이 달라졌다. 1년 동안의 삶이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는 켜진 세상에 대한 애정이 깊어진 것이다. 내가 잠든 동안에도 살아 있으며, 내가 죽은 후에도 살아있을 것이라는 시공간적 존재감이 더 강해진 것이다. 그러나 어느 세계에든 어둠이 있듯이 비실존 문화에도 폐단은 있다.

꺼진 세계에서는 쉽게 귀에 들어오지 않을 극악무도한 비난이, 켜진 세계에선 아무런 여과 없이 전달된다. 켜진 세계 속에서는 적으로 규정한 상대에 대해 극악한 공격을 거침없이 자행한다는 말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이 싫어하는 자를 마음껏 ‘씹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문제는 공격을 받는 자가 적의 위치 파악은 물론 공격 시점조차 가늠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비실존 세계가 제공하는 최악의 비방 시나리오는 웅변하는 소수의 무차별 공격이다. 그들은 21세기가 만들어 낸 최선의 문화 공간인 켜진 세계를 악을 행할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라고 믿으며 다닌다. 그들은 죽은 자의 무덤을 파헤치는 도굴꾼처럼 켜진 세계를 배회하며 파괴할 대상을 찾아다닌다. 심심한 하이에나들의 시선에 포착된 먹잇감은 온라인에서의 극심한 공격을 견디지 못하다가 결국 켜진 세계를 꺼버린다.

그것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세계라 할지라도 그 문화를 향유하며 살아야 한다면 일정한 윤리와 도덕은 있어야 한다.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졌다 해서 시도 때도 없이 찾아가 익명이 보장된다는 비열한 이유로 쉴 새 없이 악을 행하는 자들은 사라져야 한다. 게다가 이곳이 21세기 과학이 인간에게 허락한 지상낙원이라면, 그곳이 비록 실제가 아닌 비실존의 세계일지라도 착하고 아름다운 사람들을 만나고 싶은 것은 지나친 욕심이 아니라고 믿는다.

정초신 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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