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컬럼/김기현]과거사 덧칠하는 러시아

  • 입력 2005년 5월 2일 18시 2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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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러시아 모스크바 극동문제연구소에서 열렸던 전(全) 러시아 한국학대회장에서의 일이다. 한 발표자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군의 역할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을 늘어놨다.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한반도를 해방시키는 데 우리 소련 군대의 역할이 결정적이었습니다.”

정말 그런지 사실을 따져보자. 일본군은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廣島)가 원자폭탄 공격을 받자 전의를 상실했다. 그러던 차에 8월 8일 소련군이 기진맥진한 일본 측에 갑자기 선전포고를 하고 만주와 한반도로 향하기 시작해 일본이 항복하던 8월 15일까지 전투다운 전투 한번 치르지 않고 한반도까지 진격했다.

그런데 이날 학술회의장에선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이런 사료를 바탕으로 러시아의 일방적 승전론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은 여지없이 따가운 눈총을 받았던 것이다. 2차대전 승전 60주년 기념식을 앞두고 있는 터에 소련군의 빛나는 전과를 깎아내리는 행동은 일절 용납할 수 없다는 사회적 분위기에 편승한 탓이리라.

소련군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나치 독일군을 궤멸하는 등 많은 전과를 올린 게 사실이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소련군 덕분에 2차대전이 끝났고 이웃 국가들이 비로소 자유와 평화를 얻었다는 주장은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것이었다.

특히 소련군에 점령됐던 동유럽 국가들은 더욱 떨떠름한 표정일 수밖에 없다. 러시아 역사교과서들은 ‘영용한 붉은 군대(소련군)’가 동유럽을 ‘해방’시켰다고 가르치고 있지만 이들에게 소련군은 새로운 점령군이었을 뿐이다.

점령지에서 저지른 소련군의 만행은 나치 독일군 못지않았다. 세계적인 전사가(戰史家)인 영국의 앤서니 비버 박사는 “유럽 곳곳에서 소련군에게 성폭행 당한 여성이 1500만 명에 이른다”고 적고 있다.

대규모 학살도 이어졌다. 1940년 러시아 서부 카틴 숲에서 이오시프 스탈린의 지시로 이뤄진 폴란드군 장교와 지식인 2만여 명에 대한 대학살이 대표적이다.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등 주변국 정상들이 9일로 예정된 러시아의 승전기념행사 참석을 거부한 것도 해결되지 않은 과거사 문제 때문이다. 과거사를 반성하기는커녕 오히려 이를 미화하는 뻔뻔스러움을 감당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최근 오스트리아의 유력 일간지 디프레세는 ‘러시아는 왜 승전의 역사만 선전하려 하는가’라는 칼럼에서 “과거를 잊고 새로 시작하려는 시도는 프랑스와 독일의 관계에서처럼 성공한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역사란 피하려고 할수록 더 가까이 다가오는 법”이라고 지적했다. 결국 가해자가 거듭된 사죄와 반성으로 피해자에게 먼저 화해의 손을 내미는 것만이 과거사에서 자유로워지는 길이라는 설명이다.

온갖 궤변과 오만한 주장으로 ‘부끄러운 과거’를 피하고 감추려 드는 ‘역사의 가해자’들이 귀담아들어야 할 충고이기도 하다.

역사에 덧칠을 하면 한순간은 속일 수 있을지 모르나 진실까지 영원히 가릴 수 없음을 인류는 오랫동안 보아 오지 않았는가.

김기현 모스크바 특파원 kimki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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