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장관 일요편지 ''가뭄’에 대한 걱정' 전문

  • 입력 2005년 5월 2일 16시 42분


코멘트
'가뭄’에 대한 걱정

오늘은 하소연하는 심정으로 말씀드릴 작정입니다. 이 편지를 읽는 분들이 혹 ‘솔로몬의 지혜’를 줄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너무 부담 갖진 마십시오. 들어만 주셔도 좋습니다.

어제부터 오늘까지 모든 국무위원이 참여하는 ‘재원배분토론회’가 있었습니다. 앞으로 정부 예산을 어디에 중점을 두고 쓸 것인지 의견을 교환하는 자리였습니다. 조금 전까지 합숙하며 토론하다 돌아왔습니다. 나도 모르게 긴장했던 것 같습니다. 가뭄을 만난 농부가 ‘물싸움’을 하기 위해 논둑길을 걷는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어릴 적, 가뭄이 한창이던 시골이 생각납니다. 부천, 평택, 양평…. 벌써 세상을 떠나신 제 아버님은 경기도 농촌마을을 구석구석 찾아다닌 학교 선생님이었습니다. 덕분에 저도 어린 날을 속절없는 ‘농촌아이’로 지냈습니다. 그래서 한여름 가슴을 바짝바짝 태우던 그 ‘가뭄’이 농사꾼에게 어떤 것이었는지는 알듯합니다. 거북등처럼 쩍쩍 갈라진 논바닥을 애타게 바라보다 마침내 냇물마저 말라 버리면 ‘박박’ 소리가 날 때까지 우물 바닥을 긁어대던 그 심정 말입니다.

그 정도로 간절한 마음이었습니다. “새로운 시각으로 복지예산을 편성해야 한다. 획기적인 복지재원 확충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설득해야 한다는 게 부담스러웠습니다. 안되면 어거지나 땡깡을 동원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곤혹스러웠습니다. 모든 국무위원이 나름대로 마음을 가다듬고 토론회에 임하는 모습이었습니다. 모두가 자기 논에 먼저 물을 대야 하는 절박한 사연을 갖고 온 것 같았습니다. 아마도 ‘물싸움’은 그래서 벌어지는 모양입니다.

사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복지다운 복지’를 해본 적이 없습니다. ‘국민의 정부’ 이후 여러 제도를 도입했지만 아직 아닙니다. 큰 배가 방향을 돌리자면 한참이 걸리는 것처럼 여전히 ‘복지’는 부차적인 문제, 좀 나중에 해도 되는 고민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상당합니다. 지난 60년대 이후 ‘고도성장’을 최고의 가치로 모시면서 인내하고 감당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렸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사실, 우리 국민은 그동안 잘 참아왔습니다. ‘가난문제를 국가와 사회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기보다 ‘가난구제는 나랏님도 못한다.’는 쪽이었습니다. 가끔 정 많은 민족성과 이런 생각이 충돌해 국민들이 벌컥 화를 내기도 했지만 여전히 대세는 ‘복지보다는 성장’이었습니다. 성장과 분배를 함께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OECD 사회장관회의에 참석했을 때도 느꼈던 일입니다만 우리 복지제도는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지체되어 있습니다. 경제규모는 10위권인데 복지수준은 맨 끝에서 순서를 매기는 것이 훨씬 빠릅니다. 외국 전문가들이 “그런 상황에서 사회가 분열과 대립으로 치닫지 않는 것이 놀랍다.”며 고개를 갸우뚱할 정도였습니다.

지금 우리 정도의 경제력을 갖춘 나라는 모두 적극적인 복지투자를 해왔습니다. 국민소득이 1만 달러를 넘은 시점에 OECD 국가는 평균적으로 GDP의 20.4%를 사회복지분야에 지출했습니다. 우리는 아직 8.7%입니다. 어떤 전문가는 말합니다. 2030년이 되면 국민연금과 건강보험이 성숙되어, 지금 복지 선진국인 유럽 여러나라 수준에 자동적으로 이르게 된다고. 그래서 조심해야 한다는 말이겠지요.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지나치게 낙관적인 견해 아닐까요? 설혹 그렇다고 하더라도 앞으로 30년을 그냥 이렇게 세월이 가기를 바라면서 기다릴 수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 국민이 언제까지나 참아주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한 일입니다. 솔직히 저는 요즘 마음이 급합니다. ‘끓는 국은 맛을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쩌면 복지에 대한 국민의 욕구가 속에서는 이미 펄펄 끓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저출산 고령사회’라는 메가톤급 시한폭탄이 째깍거리며 돌아가고 있는 사실까지 생각하면 오싹해지기도 합니다. 지난 몇십년을 ‘경제대국-복지후진국 모델’로 사회를 밀고 왔지만 더 이상은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 우리 사회가 그 부담을 감당하기가 쉽지 않다고 느낍니다.

고민은 여기서 새롭게 시작됩니다. 복지재원을 어디서 얼마나 늘릴 수 있을까요? 지금 감당하고 있는 것도 버거워 하는 국민이 상당수인데 짐 하나를 더 짊어져 달라고 요청해도 괜찮은 걸까요? 과연 우리가 걸어온 지난 과정과 지금 닥친 상황을 종합해서 국민들이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설명하고 마음을 모아나갈 수 있을까요? 저는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믿습니다. 어렵더라도 가야만 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국무위원 토론회를 마치고 돌아온 제 기분은 한마디로 ‘희망적’입니다. 앞으로도 난관은 많겠지만 경제와 복지를 ‘선순환 시키자.’는 총론에는 상당한 합의가 이뤄져가고 있습니다. 문제는 각론입니다. 첩첩산중은 아니지만 아직 ‘산 너머 산’입니다. 그러나 꿋꿋이 앞으로 갈 작정입니다. 가다가 지치거나 다치면 여러분에게 소리치겠습니다. 그리고 허락하신다면 여러분께 기대기도 하겠습니다. 그리고나서 다시 일어나 앞으로 또 가겠습니다. ‘아자! 아자!’하면서 가겠습니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