獨과거사 논쟁 불붙다…“나치전력있는 관리 訃告회람 제외”

  • 입력 2005년 4월 29일 18시 2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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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그만 회람 하나가 독일의 과거사 청산 논쟁에 불을 붙였다.

문제의 발단은 요슈카 피셔(사진) 외무장관이 나치 전력이 있는 전현직 외무부 관리들의 부고(訃告)를 외무부 내부 회람에 싣지 말도록 지시한 것.

그러자 외무부 관리들이 들고일어났다. 70여 명의 외무부 관리들은 피셔 장관에게 반대 서한을 발송했으며 프랑크 엘베 스위스 주재 독일대사는 공개석상에서 피셔 장관의 결정을 비판하다가 파면됐다. 다른 정부 부처들도 나치 전력 관리들의 부고를 내부 회람에서 제외시킬 계획이어서 독일의 나치 청산 논쟁은 앞으로 더욱 뜨거워질 전망이라고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IHT)지는 29일 보도했다.

피셔 장관 결정의 첫 ‘희생자’는 프란츠 크라프 전 일본 주재 독일대사. 외무부는 크라프 전 대사가 외교계 거물임에도 불구하고 히틀러 집권 당시 나치당원이었다는 이유로 얼마 전 그가 죽었을 때 회람에 부고를 싣지 않았다. 그러자 100여 명의 전현직 외무부 관리들은 보란 듯이 일간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의 대형 광고지면을 사서 그의 업적을 추모하는 부고 기사를 실었다.

독일 언론은 이번 ‘부고 논란’을 독일 정치권의 ‘원칙론’과 ‘현실론’의 갈등이 표면화된 사건으로 보고 있다. 즉 ‘나치 협력자에 대한 철저한 책임 규명이 무엇보다 우선시돼야 한다’는 진보세력의 주장과 ‘설사 나치 전력이 있다 하더라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 사회 재건에 공을 세운 인물이라면 과오를 덮어줘야 한다’는 보수적 정치관료들의 주장 간의 대립이다.

‘부고 논란’을 바라보는 독일 국민의 시각은 현실적인 정치 상황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주장이 좀 더 우세한 편. 이는 비록 과거 나치에 협력했다 하더라도 단순 가담했거나 과오를 반성한 사람이라면 적극 포용해서 1950, 60년대 독일 경제성장을 이끈 콘라트 아데나워 전 총리의 지도력에 대한 존경심이 아직 독일 사회에 강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IHT는 분석했다.

그러나 피셔 장관은 외무부 내 나치협력자 조사를 위한 위원회 설치를 지시하고 나섰고 진보세력은 모든 정부 부처로 이 같은 조사위원회가 확대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어 독일 사회의 과거사 청산 논쟁은 당분간 잠잠해지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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