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 입력 2005년 4월 22일 16시 4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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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젊은 시절 그는 사창가의 다락방에서 글을 썼고, 친구들은 그 방을 ‘마천루’라고 불렀다. ‘내 슬픈…’은 이런 그의 경험이 반영된 작품이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젊은 시절 그는 사창가의 다락방에서 글을 썼고, 친구들은 그 방을 ‘마천루’라고 불렀다. ‘내 슬픈…’은 이런 그의 경험이 반영된 작품이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송병선 옮김/172쪽·9000원·민음사

사랑은 삶을 송두리째 바꿔버리는 감정의 해일인가. 아흔 살이 된 남자에게도 사랑은 그런 역할을 하는가. 콜롬비아 태생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마르케스(78)가 지난해 발표한 짧은 장편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은 이런 질문에 답하기 위해 쓰인 것만 같다.

“아흔 살이 되는 날, 나는 풋풋한 처녀와 함께하는 뜨거운 사랑의 밤을 나 자신에게 선사하고 싶었다.”

이 소설은 도발적이고 파격적인 문장으로 시작한다. 하지만 정작 정사 장면은 한번도 나오지 않는다.

소설 속의 주인공 ‘나’는 일간지 칼럼니스트다. 수줍어하는 소년의 여린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써 왔고, 사창가 난봉꾼으로 살면서 진정한 사랑에 대해 두려움을 가졌다. 결혼할 뻔하기도 했지만, 창녀들만이 줄 수 있는 자유와 너그러움을 포기할 수 없어서 결혼식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아흔 살 생일을 자축하기 위해 ‘풋풋한 처녀’를 준비해달라고 사창가의 늙은 포주에게 부탁한다. 하지만 낮에 단추공장에서 일한 뒤 남자를 처음 만나는 긴장을 달래려고 알약을 먹은 채 침상에 곯아떨어진 어린 소녀 델가디나를 차마 건드리지 못한다. 귓가에 노래를 불러주거나 땀을 닦아줄 뿐이다. 포주는 델가디나를 여러 차례 침상에서 기다리게 하지만 마찬가지 일만 벌어질 뿐이다. “내가 이 소녀를 사랑하고 있는 건가?” 아흔 살의 노인은 자탄한다.

“성당의 종소리가 오전 7시를 알렸을 때, 장밋빛 하늘에는 아주 밝은 별 하나만 떠 있었다. 배는 처량한 작별의 고동을 울렸다. 그러자 나는 내 사랑이 될 수 있었으나 그러지 못했던 모든 사랑들로 목이 메었다.”

마르케스는 싸구려 소설 같은 소재를 낭만적이고 찬연한 러브 스토리로 바꿔놓았다. 청춘과 주름짐, 에로스와 죽음, 생성과 소멸, 아름다움과 추함에 관한 이야기들이 아흔 살 노인의 목소리로 흘러나온다. 그는 사랑을 느낄수록 눈앞의 죽음이 더욱 선명해지는 것을 보게 된다.

“나는 사랑 때문에 죽는 것은 시적 방종에 불과하다고 늘 생각해왔다. 그런데 그날 오후 그녀도, 고양이도 없이 집으로 돌아오면서 사랑 때문에 죽는 일은 가능한 일일 뿐만 아니라 늙고 외로운 나 자신이 사랑 때문에 죽어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와 정반대의 것도 사실임을 깨달았다. 즉 내 고통의 달콤함을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꾸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이 소설 쓰기에는 마르케스의 두 가지 체험이 작용했다. 마르케스는 1982년 파리에서 뉴욕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잠에 빠진 미인을 7시간 동안 지켜봤다는 것이다.

그는 몇 년 전에는 일본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노인과 소녀의 성과 사랑을 다룬 소설 ‘잠자는 미녀의 집’을 읽고는 “이게 내가 쓰고 싶은 바로 그 소설”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의 구상은 지난해 10월 책으로 출간되기까지 20년 동안 발효돼왔다. 이 소설은 출간 전 해적판이 발행되는 소동까지 겪었는데 출간과 동시에 스페인어 권에서 ‘다빈치 코드’를 제치고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 마르케스는 여전히 강력한 작가인 것이다. 원제는 ‘Memoria de mis putas tristes’.

권기태 기자 k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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