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칼럼/박명진]하코네의 어린왕자와 랄리크

  • 입력 2005년 4월 21일 18시 1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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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온천 관광지인 하코네 지역에 가면 산속 어느 쪽으로 방향을 잡아도 다양한 미술관이나 박물관, 전시관들과 만나게 된다. 온천객의 심심풀이를 위한 무늬만의 미술관, 박물관이 아니다. 최근에는 고흐 전(展)도, 인상주의 회화전도 열리고 있다. 기획전시를 하는 미술관 외에도 10여 곳의 상설관이 있는데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어린왕자 박물관과 랄리크 미술관이다.

어린왕자 박물관은 ‘어린왕자’를 소재로 한 교육적인 어린이 놀이터쯤으로 상상하기 쉽지만 ‘어린왕자’의 저자인 생텍쥐페리에 관해 많은 것을 알게 해주는 아주 충실한 박물관이다. 그가 타던 비행기의 모형, 수백 장의 관련 사진, 뉴욕 중동 등 외국에서 지내던 방의 모습과 소지품, 문서, 세계 각국의 ‘어린왕자’ 판본들, ‘어린왕자’ 관련 데생, ‘어린왕자’의 주요 등장인물의 재현 등 온갖 자료를 모아 나름으로 완벽을 꾀했다. 그가 자랐던 리옹 근처의 생 모리스 드 레망스의 성(城)과 주변 마을, 마을 성당, 그가 살던 시대의 프랑스 거리 풍경까지 재현해 놓았다. 그곳에는 세계 최초의 생텍쥐페리 전문 박물관을 만들어준 데 대한 유가족의 감사 편지도 게시돼 있다.

▼외국문화 소재로 돈버는 일본▼

물론 이곳은 순수하게 ‘어린왕자’와 저자를 기리기 위한 장소만은 아니다. 수준급의 프랑스 요리 전문식당과 ‘어린왕자’를 소재로 한 캐릭터 팬시상품에서 옷, 장신구, 보석에 이르기까지 수백 가지 상품을 개발해 팔고 있다. 마을 성당은 결혼예식장으로 대여도 한다. 파리에 생텍쥐페리 재단이 운영하는 ‘생텍쥐페리 공간’이라는 기념관이 있기는 하지만 소박한 자료관 정도라서 유족과 애호가들은 저자가 살던 성을 구입해 전문 박물관을 만들기 위한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중이다. 앞으로 진짜 생 모리스 드 레망스 성의 생텍쥐페리 박물관과 하코네의 모조품 박물관이 경쟁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잔재미는 하코네 쪽이 더 하지 않을까 싶다.

아르누보와 아르데코의 거장으로 불리는 랄리크의 작품은 세계의 미술관 곳곳에 전시돼 있어서 여행을 다니다 보면 쉽게 접할 수 있다. 그러나 랄리크의 작품만을 모아놓은 전용 미술관은 프랑스에도 아직 없고 테마관 건립 계획이 있다는 소식만 들었다.

한 달 전 문을 연 하코네의 랄리크 미술관에는 그가 디자인한 보석에서 1925년에 열린 아르데코 엑스포에 출품했던 ‘프랑스의 분수’라는 15m짜리 작품을 비롯해 건물이나 기차의 내부 장식, 축조물의 오리지널 작품 등 1500여 점이 소장돼 있다. 넓은 녹지에 자리한 이곳에도 분위기 좋은 프랑스식 식당과 랄리크 작품을 복사해 판매하는 상점, 세계 각국의 공예 소품을 수입 판매하는 상점이 함께 자리하고 있다.

이 박물관들은 관광과 문화체험, 예술관련 제품 판매를 결합한 박물관 산업의 새로운 모델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일단은 어리둥절해진다. 위대한 예술가의 전문관이 꼭 그를 배출한 나라에만 있으라는 법은 없지만 최소한 그 나라가 주요 활동무대였던 경우가 아니면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고, 두 예술가 모두 일본과 특별한 연고가 있는 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상설 전문관을 만들기까지는 자본도 엄청나게 들었겠지만 해당 작가에 대한 집착에 가까운 관심과 오랜 기간에 걸친 수집 작업이 필요했을 것이다. 오타쿠(마니아) 문화가 발달한 일본에나 있음직한 시도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정신자세일 것이다. 코스모폴리탄적 이상을 실천하기 위해서이거나 팽창주의적 성향 때문일 텐데, 하코네의 경우는 과연 어디에 해당될까.

▼韓日‘용사마’ 저작권 다툴수도▼

찜찜한 것은 또 있다. 이런 새로운 모델의 박물관 사업으로 랄리크나 생텍쥐페리는 프랑스가 배출했지만 정작 그로 해서 돈을 버는 것은 일본이 되는 게 아닌가. 어느 날 ‘어린왕자’와 ‘성(星)의 왕자’(어린왕자의 일본식 지칭) 간에, 랄리크와 ‘라리쿠’(랄리크의 일본식 발음) 간에 저작권을 둘러싸고 대결하는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 김치가 ‘기무치’와 식품 국제표준을 놓고 갈등을 벌였듯이 어느 날 배용준과 용사마 간의 대결장이 펼쳐지는 순간이 오는 것은 아닐까 하는 황당한 상상도 하게 된다. 팽창주의적 국가를 상대해서는 문화 수출에도 특별히 경계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박명진 객원 논설위원·서울대 교수·언론학 mjinpark@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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