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살아보니/폴 리차드스]축구열정만큼 헌혈했으면…

  • 입력 2005년 4월 21일 18시 1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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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람들은 뜨거운 열정과 끈끈한 애정을 가슴에 담고 살아가는 것 같다. 한국에서 2년간 생활하면서 여러 번 그런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한 가지 잘 이해되지 않는 행동이 있다.

바로 헌혈 기피증이다. 내가 평소에 생각하는 한국인 모습대로라면 남들에게 베푸는 걸 선호할 것 같은데 오히려 반대라고 하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가장 쉽게 남을 돕는 길이 ‘헌혈’인데도 말이다. 헌혈자가 부족해 다른 나라에서 피를 사와야 할 처지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유럽에서 살면서 가끔 헌혈을 했던 나는 한국에 와서도 헌혈을 한 적이 있다. 다 끝내고 나니 헌혈증서를 만들어 줬다. 외국에서는 한번도 보지 못한 거라 물어 보니 헌혈을 장려하기 위한 차원에서 고안됐다고 했다. 헌혈증서가 있으면 나중에 위급한 사항에 처했을 때 먼저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설명이었다. 헌혈증서까지 주는데도 헌혈을 꺼리는 이유가 더 궁금해졌다.

그러던 중 유교문화 얘기를 듣게 됐다. 몸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므로 다치거나 해하지 않는 게 효도의 시작이라는 인식 때문에 피 뽑기를 꺼린다는 것. 아울러 수혈을 통한 질병 감염 사고의 발생도 헌혈을 꺼리는 분위기에 일조했다고 한다. 안심하고 피를 주고받을 수 있도록 세심한 관리가 필요할 것이다.

영국에서도 한국처럼 헌혈자에게 간단한 선물을 증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영국 등 유럽의 적십자 헌혈 캠페인은 일반인들의 인식을 바꾸는 데 초점을 맞춘다. 모기 한 마리 옆에 적힌 ‘지난 1년간 당신이 헌혈한 혈액량보다 모기에게 물린 양이 더 많다’는 메시지는 헌혈을 등한히 해 온 자신을 돌아보게끔 한다. 단순하지만 사람들의 헌혈 의욕을 북돋는 효과가 있다.

영국에서는 헌혈하기에 가장 좋은 날로 흔히 일요일을 꼽는다. 제대로 헌혈하려면 술을 먹어서도, 잠을 부족하게 자서도, 무리한 운동을 해서도 안 된다. 그래서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주말을 선호하는 것이다. 특히 일요일 오전에 교회에 다녀와서 점심식사를 한 뒤 가족 또는 친구들과 함께 헌혈한 적이 많다. 주말에 좋은 일을 하고 나면 새로운 한 주의 시작이 상쾌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 기분을 좋아했다. 어려운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헌혈은 어려운 게 아니라 누구나 쉽고 편안하게 참여할 수 있는 작은 봉사라는 인식이 확산됐으면 한다. 한일월드컵 당시 하나로 뭉치게 했던 관심과 열정의 일부만 모아져도 헌혈 부족이라는 걱정은 쉽게 해결될 것이라고 감히 기대해 본다.

폴 리차드스 한국존슨 사장

▼약력▼

1961년 영국에서 태어나 영국의 러프버러 공대에서 식품공학을 전공했다. 2년 전 한국 땅을 처음 밟은 그는 휴일 등을 이용해 가족들과 더불어 서울 거리를 구경하면서 김치 비빔밥 불고기 등 한국 음식을 즐겨 먹는 편이다. 여행을 좋아하며 아들과 함께 축구경기를 자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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