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윤상호]자주국방, 구호로만 되나

  • 입력 2005년 4월 18일 18시 2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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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6월 12일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 군수협력위원회에서 오갔던 양측의 대화 내용은 한국이 추구하는 자주국방의 현실을 되돌아보게 하기에 충분하다.

회의에선 미국이 한반도 전쟁예비물자(WRSA)의 폐기 방침을 공식 제기해 한미 간에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이 자주국방을 강조하니 WRSA도 한국 자력으로 비축하라는 게 미국의 논리였다. 한국은 “현 경제 여건상 단기간에 국방예산을 올리는 것은 힘든 만큼 준비될 때까지 WRSA를 유지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 대화로 보면 미국 측은 노 대통령의 자주국방론을 ‘적극’ 수용했으나 오히려 한국 측이 소극적이었던 셈. 한국 측이 이런 미묘한 태도를 보인 데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경제적 부담’도 중요한 이유였을 것이다. WRSA 비용은 총 5조 원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미국의 방침은 완고했다. 그로부터 1년 뒤 조영길(曺永吉) 국방부 장관에게 2006년 말까지 WRSA를 폐기한다는 폴 울포위츠 미 국방부 부장관의 서한이 날아들었다.

자주국방은 구호와 의욕만으로 이룰 수 없다. 그 냉엄한 현실은 각종 통계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한 해 국방예산이 약 4000억 달러(약 400조 원)에 이르는 미국을 제외하고 지구상의 어느 나라도 진정한 자주국방은 실현하지 못하고 있다.

일본의 2004년 국방예산은 450억 달러로 한국의 3배나 되지만 미일동맹의 우산에 몸을 숨기고 있다. 아시아 최강의 핵전력을 보유한 중국은 비공식적으로 한 해 500억 달러를 군사비로 쓰지만 도광양회(韜光養晦·빛을 감추고 때를 기다림)하며 내실을 다지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호기롭게 내세운 ‘자주국방론’이 미국에는 오랫동안 고민해 온 WRSA 폐기의 빌미를 제공했고, 국내적으로는 국민 부담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초래한 것 아닌가.

요란스럽게 자주국방을 외치기에 앞서 냉엄한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국방전략을 세웠더라면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각종 첨단 전력 사업이 예산 문제로 수년째 연기되는 상황에서 자주국방은 구호일 뿐이라는 군 안팎의 지적을 정부가 되새겨봐야 할 때다.

윤상호 정치부 ysh100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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