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SA폐기]美, 盧대통령 자주국방論 거론하며 냉담

  • 입력 2005년 4월 18일 02시 5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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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전쟁예비물자(WRSA) 프로그램의 폐기방침을 통보한 2003년 6월 제35차 한미연례안보협의회(SCM) 군수협력위원회(LCC) 회의록은 한미관계의 현주소를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

미국 국방부의 한 관계자는 “당시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은 자주국방을 역설했지만 한국 국방부는 WRSA 폐기 방침의 철회를 미국에 설득하느라 고군분투했다”고 말했다. 특히 미국 측의 일관된 입장은 ‘한국의 사정’과는 관계없이 독자적인 프로그램에 입각해 한미군사동맹의 변화를 추구해 나가겠다는 냉정한 것이었다.

▽대미 설득논리 총동원=한국은 WRSA 폐기 방침에 상당한 위기의식을 느끼고 정치, 경제, 군사적 논리를 총동원해 미국 측에 WRSA 프로그램의 유지를 강력히 요청했다.

한국 측은 ‘한국의 자주국방을 위해서도 WRSA 프로그램을 폐기해야 한다’는 미국의 주장에 대해 “WRSA 프로그램이 한국의 자주국방 노력에 기여하고 있지, 이를 방해하는 요소는 아니라고 믿는다”고 설명했다.

한국이 경제규모에 맞는 국방예산을 쓰지 않고 있다는 미국의 주장에 대해선 한국이 예산 압박에도 불구하고 세계 10위권의 국방투자를 해 왔다고 반박했다.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 2001년판 연감을 인용, 냉전이 끝난 1991년 이후 세계 군사비는 11%가 줄었지만 한국은 7.8%가 늘었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한국은 또 북한 핵문제 해결을 위해 한미 양국이 공동 노력하는 상황에서 미국의 WRSA 프로그램 폐기 제안은 한국을 실망시킬 뿐이라는 논리를 폈다.

▽미국의 냉담한 반응=한국 측의 집요한 설득에도 불구하고 미국 측은 WRSA 폐기를 고수해 한미 간 이견이 심각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미국 측이 WRSA 프로그램의 폐기를 주장하면서 노 대통령의 자주국방론을 언급한 것은 주목할 대목이다. 당시 취임 4개월째였던 노 대통령은 주한미군에 대한 지나친 안보 의존은 곤란하다며 자주국방과 자주외교를 역설하고 있었다.

미국은 노 대통령의 취임 이전부터 한국에 대한 WRSA 프로그램을 폐기하겠다는 방침을 갖고 있었지만 노 대통령의 태도가 이 프로그램의 폐기 당위성을 한국 측에 강조하는 빌미가 된 측면이 없지 않아 보인다.

한편 미국이 WRSA 프로그램은 한국 경제가 성장할 때까지의 ‘한시적 조치(temporary measures)’라고 강조한 것은 한국의 ‘안보 무임승차’에 제동을 걸겠다는 의도를 나타낸 것으로 해석된다.

▽국방부, WRSA 폐기 반대 왜 숨겼나=한국 국방부는 WRSA 프로그램의 폐기가 초래할 수 있는 안보공백을 우려했으면서도 국민들에겐 이를 숨기려 했다는 비판을 면키 어려울 것 같다.

한국에 비축된 WRSA의 99%는 전시탄약으로, 이는 한반도 유사시 초기 탄약소요량의 60%를 차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미국이 만일 한국에서 이를 반출할 경우 한국군의 탄약보유량은 10일치에 불과해 초기 전쟁수행능력에 악영향이 우려된다는 것이 많은 군사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국방부가 2003년 당시 미국 측에 WRSA 폐기계획의 재고를 강력히 요청한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국방부의 한 관계자는 최근 기자회견에서 “WRSA의 탄종의 국내 생산이 가능하고, 노후탄약이 많아 관리에 어려움이 많다”며 WRSA 프로그램의 폐기계획에 공감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는 특히 “WRSA가 없어도 유사시 한국군의 전쟁수행능력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다”고 주장했다.

국방부는 미국의 WRSA 폐기 통보가 한미동맹의 이상 징후를 보여주는 것이라는 언론 보도에 대해선 국민의 불안감만 키우는 ‘안보상업주의’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한편 미국이 한국에 통보한 WRSA 프로그램의 구체적인 폐기시한에 대해선 국방부의 설명과 2003년 회의록의 내용에 차이가 있다.

최근 국방부의 발표에 따르면 미국은 WRSA 폐기 방침을 2003년 공식 제기했으며, 2004년 5월 폴 울포위츠 미 국방부 부장관이 조영길(曺永吉) 당시 국방부 장관에게 WRSA 프로그램 폐기시한을 ‘2006년 12월’로 통보한 것으로 돼 있다.

그러나 2003년 회의록엔 미국이 WRSA 프로그램의 폐기시한을 ‘2007년까지’라고 밝힌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에 따라 미국의 방침이 지난 2년 사이에 바뀐 것으로 보인다.

윤상호 기자 ysh100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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