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전주성]외국자본 길들이기 안통한다

  • 입력 2005년 4월 17일 18시 21분


코멘트
1990년대 초반 어느 해 여름, 국제투자에 대한 연구를 하기 위해 미국 워싱턴에 머물 때다. 세계적인 회계법인의 조세총괄 사장 방에 들렀더니 연구와 관련된 회계사와 변호사 10명 정도를 불러 차례로 소개해 줬다. 당시 미국 정부는 1980년대 이후 급증한 외국인투자가 이익은 올리면서 세금은 별로 내지 않자 이에 대한 법규와 조사를 강화하고 있었다.

신출내기 교수였던 내가 놀랐던 것은 그때 만난 전문가들이 얼마나 다양하고 해박하게 세금 안 내는 방법을 꿰뚫고 있느냐가 아니라, 이들의 절반이 국세청 등 정부에서 일하다 스카우트된 사람들이었다는 점이다.

국제 거래에 대한 과세는 미국같이 법규 정비가 잘 돼 있고 행정 인력이 풍부한 나라에서도 쉽지 않다. 쫓는 측보다 피하는 측의 자원이 풍부하기 때문이다. 또한 과세권이 여러 나라에 걸쳐 중복되기 때문에 국가 간 갈등으로 이어지기도 쉽다.

요즘 대다수 나라들이 참고로 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국제조세 관련 모범 규정들도 사실은 미국과 유럽국가들 간의 미묘한 힘겨루기의 산물인 경우가 많다. 이러다 보니 억지로 상대국의 기업에 세금을 매기기보다는 자본 교류도 활성화할 겸 세금을 동시에 낮춰 주는 조세조약이 늘어나게 되었다.

▼생산자본-투기자본 구분 모호▼

이런 와중에 낮은 세율을 상품으로 틈새시장을 파고드는 소위 조세피난처(tax haven) 국가들이 속속 등장했다. 국제자본이나 다국적기업이 이런 절호의 기회를 마다할 리 없다. 근래에 이런 행위를 규제하자는 분위기가 국제적으로 무르익고 있지만 법규정의 정비는 아직 뒤따르지 못하고 있다. 그만큼 빠져나갈 구멍이 많다는 얘기다. 따라서 정작 과세 당국이 칼을 빼고 나서도 법적 소송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더욱 중요한 문제는 자본 이동이 가속되면서, 세금을 깎아 주더라도 외국자본을 유치하자는 것이 최근의 국제적 추세라는 점이다. 현실적으로 생산자본과 투기자본을 구분하기 힘들고 또 설사 식별한다 하더라도 이들을 효과적으로 차별할 법규정의 정비가 쉽지 않다.

결국 탈세의 단속은 투자 사안별로 처리할 수밖에 없는데 이를 위해서는 정보 공유 등 관련 국가들의 협조가 절대적이다. 한 나라만 배신해도 힘든데, 예컨대 금융거래의 비밀 엄수를 국부의 원천으로 삼는 스위스 같은 나라가 협조할 리 없다.

이처럼 완벽하지 못한 제도와 환경에서는 나라마다 폭 넓은 국익의 차원에서 외국자본 과세 정책을 수립할 수밖에 없다. 최근 외국계 펀드에 대한 우리 국세청의 세무조사를 놓고 혼란과 논란이 발생하는 것은 국제소득 과세와 관련된 근거 법규는 물론 외국자본 전반에 대한 정책적 청사진도 미흡한 나라가 갑자기 기합소리를 내며 ‘적진으로 돌진’하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다 보니 개방을 강조하는 경제부총리와 과세 주권을 내세우는 국세청이 부닥치는 것처럼 잘못 묘사되고 재벌들의 경영권 방어 목적에 정부가 휘둘린다는 오해를 사는 것이다.

▼조세협정-법규 정비 나서야▼

요컨대 외국자본에 대한 과세는 국제 관행과 자국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예민하고 현명하게 처리할 사안이다. 미시적으로는 인수합병 법규와 개별 조세협정을 정비해 자본의 중립성과 과세 형평을 추구하고, 거시적으로는 외국자본의 부작용보다 혜택이 커지도록 정책 환경을 개선해야 한다.

원론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불법적 투기 거래는 단속하되 개방시대의 경쟁에 적합하도록 우리 기업의 자생력부터 길러야 한다는 한덕수 경제부총리의 방침이 정책의 신뢰도나 적합성의 측면에서 정도인 것이다. 큰길을 틀어막고 음주단속하듯 외국자본을 길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전주성 이화여대 교수·경제학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