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허엽]출판계가 꼭 해야 할 몇가지

  • 입력 2005년 4월 17일 18시 2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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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45만 부 판매를 기록하며 베스트셀러에 오른 ‘살아 있는 동안 꼭 해야 할 49가지’라는 에세이집이 독자들을 실망시켰다. 책에선 지은이를 중국인 탄줘잉(覃卓潁)이라고 소개했는데 일부 내용이 오래전에 ‘리더스 다이제스트’ 등에 실렸던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문제가 불거지자 출판사도 이를 인정하고 16일 이후 발간되는 책부터 저자를 편저자로 고치겠다고 말했다. 아울러 사과문 발표와 이익의 일부를 사회 기금으로 출연하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고 이 출판사의 김태영 사장이 밝혔다.

이로써 일단락되는 듯하지만 이 일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번역서 발행률과 시장점유율이 가장 높은 한국 출판계의 단면을 보여 주고 있다.

사건 발생 직후 기자가 책날개의 저자 소개란을 보니 참 모호했다.

‘1969년생으로 중문학을 전공했으며 신문사 출판사 등에서 편집자로 오랫동안 일했다.’ 저자가 어느 학교를 나왔는지, 어디서 일했는지 등 ‘팩트’가 거의 없었다.

의아한 나머지 몇몇 출판인한테 전화를 걸었다가 더 놀라운 ‘소문’도 들을 수 있었다. 유명 필자의 이름을 빌려 출판사가 책을 짜깁기하는 사례도 있었고 해외 무명 필자의 경우 그 신뢰 문제는 출판사의 양식에 맡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출판계 내부에서도 외서(外書) 번역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은 이달 초 출판전문지 ‘기획회의’의 특집 ‘번역 출판의 오늘을 말한다’에서 “명목상의 역자는 초벌 번역을 해 주는 보조적인 역할에 머물고 편집자가 사실상 번역자 노릇을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대한출판문화협회 통계에 따르면 국내 신간 3만5394종 중 번역서가 1만88종으로 28.5%, 초판 발행부수로는 32%에 이른다. 신간 세 권 중 한 권이 번역서인 셈이다.

동아일보 북섹션 ‘책의 향기’를 1주일에 한 차례씩 만들면서 피부로 느끼는 번역서의 비중은 이보다 훨씬 높다. 그 틈새를 비집고 기사로 소개할 만한 국내 필자의 책을 만나면 반가움이 앞선다.

이는 ‘번역서로 대박을 꿈꾸는’ 출판계의 행태에서 비롯된 것으로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번역서의 비중은 1990년대 초반에 비해 최근 두 배나 뛰었다. 어린이들이 보는 아동 서적과 만화는 40%에 이르고 번역서의 약 70%가 미국과 일본의 책이라는 편중 문제도 심각하다.

이에 대해 한 출판사 사장은 “해외의 큰 시장에서 공인된 히트작을 번역하는 게 시간과 돈을 쏟아야 하는 국내 필자 발굴과 기획보다 훨씬 경제적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초기 저작권료 200만∼300만 원과 이보다 조금 못한 번역료로 웬만한 신간을 준비할 수 있고 해외 북사이트에 대한 ‘인터넷 서핑’만으로도 좋은 기획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출판은 한국 문화의 저수지이자 지식산업의 근간이라는 평가를 받아 왔다. 그러나 실상은 번역서의 범람이고 탄줘잉의 책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일도 생긴다. 다른 세상을 전하는 번역서의 지적 촉매 역할은 계속되어야 하지만 한류(韓流)를 일으킨 한국 영화나 가요에 비하면 출판계는 꼭 해야 할 일을 미루는 것 같다.

허엽 문화부 차장 he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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