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432>卷五.밀물과 썰물

  • 입력 2005년 4월 14일 18시 5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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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실로 알 수 없구나. 그동안 잊은 듯 버려두었던 그 일이 이제 와서 왜 이토록 급해졌는가? 군신이 오랜만에 마음 편히 술 한 잔 나누려는데 이렇게 정색을 하고 찾아와 과인을 재촉하는 까닭이 무엇인가?”

한왕이 여전히 빙글거리는 말투로 그렇게 물었다. 수하가 정색을 풀지 않고 말했다.

“사자(使者)에게는 사자의 밑천이란 게 있는 법입니다. 지난번에 제가 대왕께 받은 밑천은 의장과 폐백이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덜 갖춰진 밑천이 있어 기다려왔는데, 이제 갖춰졌기에 이렇게 떠날 채비를 하고 온 것입니다.”

“이번에 갖춰진 밑천이 무엇인가?”

“때라고 하는 밑천입니다. 사자가 아무리 위엄을 꾸미고 폐백을 훌륭하게 갖춘다 해도 때가 맞지 않으면 그 뜻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지난번 우현(虞縣)에서 신이 나선 것은 대왕께서 팽성 싸움으로 대군을 잃고 경황없이 쫓기실 때였습니다. 또 그 뒤로도 패왕은 그 위엄이 천하를 떨게 하는데, 대왕께서는 관중(關中)도 온전히 보존하고 계시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그때는 제가 아무리 그럴듯한 의장(儀仗)에다 귀한 폐백을 수레 가득 싣고 간다 해도 구강왕(九江王)을 우리 편으로 달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대왕께서는 관중을 정비하시고, 위(魏) 대(代) 조(趙) 연(燕) 네 나라를 잇달아 평정하시어 관동에서도 위엄을 떨치셨습니다. 천하에 패왕과 맞서 싸울만한 능력과 경륜을 보이셨으니, 구강왕 경포(경布)도 전과 달리 대왕의 뜻을 쉽게 떨치고 돌아서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에 드디어 떠나보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자 한왕도 비로소 웃음기를 거두고 말했다.

“원래 경에게 그렇게 깊은 헤아림이 있었구나. 과인의 말을 너무 껴듣지 말라.”

그리고는 좌우를 시켜 수하에게 전에 약속한 스무 명의 관원과 거기 맞는 의장을 갖춰 주도록 했다. 또 경포에게 보낼 폐백 말고도 황금을 넉넉히 주어 수하가 사행(使行) 길에 쓰기에 군색함이 없게 했다.

한(漢) 3년 11월 초순 알자(謁者) 수하는 스무 명의 관원과 그들을 따르며 호위와 물자 운송을 맡을 이졸(吏卒) 수십 명을 이끌고 구강으로 떠났다. 크게 펄럭이는 기치를 앞세우고 위엄 있는 복색을 갖춘 관원이 탄 말이 서른 기(騎)가 넘는데다, 폐백과 물자를 실은 수레가 다시 10여 대라 당시로는 보기 드물게 규모가 큰 사행이었다.

형양에서 천리가 훨씬 넘는 길을 열흘 만에 내달린 수하가 도읍인 구강에 이르자 구강왕 경포도 그 소문을 들었다. 당시의 관례는 신부(信符)를 지닌 다른 나라의 사자가 오면 먼저 조정의 대신들 중에 하나가 주인이 되어 사자를 손님으로 받아 그 사저(私邸)에 묵게 했다. 구강왕 경포는 먼저 태재(太宰)에게 주인이 되어 수하 일행을 손님으로 치게 했다.

그때 구강의 태재는 주나라 관제에서 말하는 태재와는 달랐다. 나라 일을 맡아 다스리고 살피는 일보다는 궁중의 음식수발을 드는 관리[구식지관]를 그렇게 불렀는데, 경포가 태재에게 수하 일행을 맡긴 것은 그만큼 그들을 가볍게 보았다는 뜻도 된다. 그러나 그 태재가 또한 육(六)땅 사람이라, 경포 수하와 더불어 같은 고향이니, 어찌 보면 수하에게는 잘된 일일 수도 있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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