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오명철]왕세자비

  • 입력 2005년 4월 14일 18시 2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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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세자’라는 이름의 자리는 세상에서 가장 감당하기 어려운 직분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막강한 권력을 쥔 왕의 공식 후계자인 만큼 고도의 정치적 판단과 절제가 필요하다. 결코 왕을 앞질러서는 안 되고, 너무 뒤처져 있어도 안 된다. 꿈에서조차 왕의 ‘한발 뒤, 한발 왼쪽’에 있어야 하는 왕세자를 뒷바라지하는 ‘왕세자비’란 자리는 그래서 더욱 조심스럽고 외로울 터이다.

▷일본 왕위계승 서열 1위인 나루히토(德仁) 왕세자의 부인 마사코(雅子) 왕세자비가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는 뉴스다. 5개 국어에 능통한 직업외교관 출신의 신여성이 왕실 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와 아들을 낳으라는 왕실 안팎의 압력을 견디기 어려워하고 있다는 것이다. 평민 출신으로 2남 1녀를 낳은 시어머니 미치코(美智子) 왕비도 한때 실어증(失語症)에 걸릴 정도였으니 왕실 여성의 고통을 짐작할 만하다. 일본 왕실은 10년 이상 마사코 왕세자비의 득남을 고대해왔다.

▷영국의 다이애나 왕세자비 또한 모든 여성의 질시와 부러움에도 불구하고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 남편인 찰스 왕세자의 공공연한 외도와 무관심 때문이었다. 그는 1997년에 결국 불의의 자동차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는 영국인들의 가슴에 ‘영원한 왕세자비’로 남아 있다. 반면 35년 만에 찰스 왕세자와 재혼해 결혼식을 올린 커밀라 파커볼스 씨는 ‘왕세자비’라는 공식 직함이 아닌 ‘왕의 배우자’란 호칭에 만족해야했다.

▷조선의 가장 비극적인 왕세자비는 남편인 사도세자가 시아버지인 영조대왕에 의해 뒤주 속에 갇혀 죽는 참상을 지켜봐야 했던 혜경궁 홍씨일 것이다. 그의 깊은 슬픔은 ‘한중록(閑中錄)’에 절절이 녹아 있다. 조선 왕조의 마지막 왕세손 이구의 부인 줄리아 역시 왕실의 대를 이을 아들을 낳지 못한 외국 여성이라는 이유로 종친들에 의해 사실상 강제 이혼 당한 뒤 고독한 노후를 보내고 있다. 만인이 부러워하는 자리일수록 그늘 또한 깊구나.

오명철 논설위원 osc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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