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자전쟁] “로열티까지 물면 어떻게 버티나”

  • 입력 2005년 4월 14일 02시 5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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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종보호 대상 작물이 많아지면서 외국 품종의 작물을 재배하는 농가가 외국 종묘회사에 모종 원가의 10% 이상을 로열티로 지급하는 일이 늘고 있다. 내년에 품종보호 대상이 되는 딸기를 재배하는 농가는 딸기 한 포기에 10∼100원의 로열티를 물게 될 전망이다. 강원 강릉시의 한 딸기밭에서 농민이 딸기를 따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품종보호 대상 작물이 많아지면서 외국 품종의 작물을 재배하는 농가가 외국 종묘회사에 모종 원가의 10% 이상을 로열티로 지급하는 일이 늘고 있다. 내년에 품종보호 대상이 되는 딸기를 재배하는 농가는 딸기 한 포기에 10∼100원의 로열티를 물게 될 전망이다. 강원 강릉시의 한 딸기밭에서 농민이 딸기를 따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 한숨짓는 국내농가

“모종 원가의 10% 이상을 로열티로 내라뇨. 농사짓지 말라는 소리죠.”

경남 산청군 시천면에서 27년째 딸기농사를 짓고 있는 김수현(金洙現·54) 씨는 “올해처럼 위기감을 느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내년부터 딸기가 품종보호 대상이 돼 원가가 100원인 일본산 모종 하나에 10원이 넘는 로열티를 물어야 하기 때문이다.

김 씨가 3000평 규모의 딸기밭에서 농사를 지어 올리는 총매출액은 연간 1억2000만 원. 인건비, 비료값, 시설비 등을 빼고 손에 쥐는 돈은 4800만 원이다. 딸기 로열티를 물고 나면 김 씨의 영업이익은 3600만 원 선으로 줄어든다.

그는 “밭이 300평 이하인 영세 딸기 농가는 더 큰 타격을 받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로열티 “내놔” “못 내놔”=종자전쟁 1차전은 로열티를 내지 않으려는 국내 농가와 반드시 징수하려는 외국 종묘회사 간 줄다리기로 시작됐다.

2001년 장미가 품종보호 대상이 되면서 촉발된 이 분쟁은 국내 수요가 많은 작물이 품종보호 대상에 대거 포함되는 내년에는 훨씬 더 뜨거워질 전망이다.

장미, 국화, 심비디움(양란), 딸기 등은 씨앗이 아닌 줄기의 일부를 떼어내 심어도 꽃을 피울 수 있는 ‘영양 번식체’다. 종자만으로 번식하는 작물은 종자 값에 로열티를 붙여 판다.

반면 영양 번식체는 로열티를 물리기가 어렵다. 농가들이 임의로 줄기를 떼어 번식시키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이용해 심비디움 등을 재배하는 농가들은 로열티를 내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한국화훼협회 박종찬(朴鍾燦) 회장은 “심비디움뿐 아니라 모든 종류의 화훼를 재배하는 농가가 품종보호에 대해 준비가 안 돼 있다”고 우려했다.

이 때문에 지난해 독일 코르데스사 등 외국계 종묘회사가 종자산업법 위반으로 국내 농가를 고소하는 등 분쟁도 늘고 있다.

하지만 농민들은 “배(모종 원가)보다 배꼽(로열티)이 크다”며 볼멘소리를 한다. 전남 강진군에서 장미를 재배하는 한모 씨는 “외국 회사들이 그루당 1050원 하던 장미 가격에 1450원의 로열티를 매기는데 어떻게 농사를 짓겠느냐”고 말했다.

▽가열되는 종자개발 경쟁=국내 연구기관과 외국계 종묘회사의 종자 개발 경쟁도 치열하다.

일본 게이세이, 독일 코르데스, 미국 심플롯 등 세계적 종묘회사들은 대규모 자본을 투입해 개발한 화훼 종자를 국내 종자산업법 상 품종보호 대상으로 등록하고 있다.

현재 외국계 종자회사가 품종보호 대상으로 신청한 작물은 모두 635개. 화훼작물이 626개로 가장 많고 채소 1개, 과수 8개 등이다. 장미 국화 봉선화 등 국내 수요가 많은 화훼작물에 특허 출원이 집중됐다.

국내 종자산업의 대응은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를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다. 종묘회사가 신품종을 개발할 여력이 없기 때문.

농촌진흥청 원예연구소는 최근 대형 국화인 ‘원교 B1-97’을 개발했다. 전남 농업기술원은 지난달 신품종 장미 ‘한마음’을 특허 출원했다.

▽선택과 집중=원예연구소가 이달 중순 청와대에 보고할 ‘국내 종자산업과 로열티 지급현황’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농가가 2003년 장미 국화 카네이션 거베라 포인세티아 등 5가지 화훼작물에 대해 지급한 로열티는 137억4000만 원이다.

장미(129억 원), 카네이션(5억3000만 원), 국화(2억 원), 거베라(8000만 원), 포인세티아(3000만 원) 등의 순.

원예연구소 박교선(朴敎善) 연구사는 “모든 작물에 대해 국제경쟁력을 갖출 수는 없으므로 수요가 많은 작물 품종을 선택해 집중적으로 개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소비자 부담도 커져=로열티 지급이 늘면 소비자 부담이 커진다. 재배 농가의 원가 부담이 커지면 소비자 판매가도 오르기 때문.

현재 100원 안팎인 딸기 모종 원가는 로열티가 더해지면 110∼200원으로 뛴다. 이렇게 되면 2kg당 평균 7875원인 딸기 가격은 내년 이후 10% 이상 오를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농림부 당국자는 “일시적으로 가격이 오를 수 있지만 국내 우량품종이 많이 개발되면 로열티 부담이 줄어 가격이 다시 안정세를 보일 것”이라고 말했다.

홍수용 기자 legman@donga.com


■ 국내시장 다국적기업이 장악

흥농종묘, 중앙종묘, 서울종묘 등 한국의 대표적인 종자(種子)회사들은 외환위기 이후 대거 다국적기업으로 넘어갔다. 이에 따라 고추, 무, 배추 등 한국인이 많이 먹는 채소류의 토종종자 소유권도 다국적기업에 넘어갔다.

세미니스, 신젠타, 사카타 등 미국계, 유럽계, 일본계 다국적 종자회사들은 연간 시장규모가 1300억∼1500억 원에 이르는 국내 채소종자 시장에서 50% 이상을 장악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 박현태(朴炫泰) 박사는 다국적기업의 국내 종자시장 장악에 대해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혼재돼 있다”고 말한다.

긍정적인 효과는 첨단 유전공학 기술 및 시설을 갖춘 다국적기업들이 경쟁자로 등장하면서 국내 토종회사들도 자극을 받아 새로운 종자개발과 종자 보관 기술이 향상된 점.

한농바이오 유영우(劉永佑) 본부장은 “토종 종자회사인 농우바이오가 외국계 회사들을 제치고 시장점유율 2위로 올라선 것도 이런 자극 덕분”이라고 말했다.

덤핑판매, 다른 회사가 개발한 종자 베끼기 등 전근대적인 유통체계나 불공정한 경쟁문화도 많이 사라졌다.

부정적인 측면은 국내 토종 종자의 소유권을 다국적기업이 갖고 있어 이 분야에서 창출될 부가가치를 다국적기업이 독점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아직은 고추, 무, 배추의 해외 수요가 크지 않아 이런 측면은 염려에 머물고 있다.

하지만 문화산업의 ‘한류(韓流)현상’처럼 한국의 채소에 대한 해외 수요가 생기더라도 그 과실은 다국적 종자회사가 챙길 가능성이 높다. 다국적기업은 외국인의 입맛에 맞는 채소 개발과 마케팅 능력 면에서 토종기업에 비해 압도적인 경쟁력을 갖고 있다.

박현태 박사는 “다국적 종자회사들이 대규모 인수합병을 통해 전 세계 종자에 대한 소유권을 확보하는 것은 세계적인 흐름”이라면서 “약진하고 있는 국내 생명공학 기술을 이용해 토종 종자업체들도 경쟁력 확보에 더욱 매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병기 기자 eye@donga.com


■ 국내농가 피해 줄이려면

‘종자전쟁’에 따른 로열티 급증 등 국내 농가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는 국내 종자개발 실태에 대한 정밀조사가 시급하다.

정부는 1997년 12월 말 발효된 종자산업법을 근거로 2009년까지 모든 종자를 품종보호대상으로 지정해 종자 개발업자에 대한 특허권을 인정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에 따라 지난해까지 벼 보리 콩 옥수수 감자 밀 사과 배 등 155개 작물이 품종보호 대상으로 지정됐다.

내년에는 메밀 딸기 부추 등 31종의 작물이 품종보호 대상으로 지정되며 2008년에는 조 기장 수수 감 자두 살구 매실 등 23종이 추가로 지정된다. 마지막으로 2009년에는 나머지 모든 작물이 품종보호 대상이 된다.

정부는 이 계획을 세울 때 작물별로 국내 품종의 비율이 높은 작물을 먼저 품종보호 대상으로 지정하고 국내 품종의 비율이 낮은 작물을 나중에 지정한다는 원칙을 따랐다.

전문가들은 장기적인 국내 종자개발 계획을 수립하는 한편 국내 종자 개발 실태에 대한 정확한 조사를 벌여 이를 바탕으로 품종보호 대상 지정 계획을 적절하게 수정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농림부 관계자는 “품종보호 대상으로 지정하기 전에 국립종자관리소 등이 여론 수렴 절차를 거치고 있지만 세부적인 실태조사를 벌이지는 못했다”며 “딸기 등 일부 품종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품종이 보호대상 지정계획에 따라 지정되고 있다”고 말했다.

신치영 기자 higgle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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