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히틀러 최후의 14일’…헛된 야욕의 끝

  • 입력 2005년 4월 8일 16시 5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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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초기 잇단 승전보 속에서 환호에 둘러싸여 있는 아돌프 히틀러. ‘히틀러 최후의 14일’ 저자인 요아힘 페스트 씨는 그가 전쟁 초기부터 ‘적을 멸망시키지 못하면 세계의 절반과 함께 몰락하겠다’는 파괴적 본능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진단한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제2차 세계대전 초기 잇단 승전보 속에서 환호에 둘러싸여 있는 아돌프 히틀러. ‘히틀러 최후의 14일’ 저자인 요아힘 페스트 씨는 그가 전쟁 초기부터 ‘적을 멸망시키지 못하면 세계의 절반과 함께 몰락하겠다’는 파괴적 본능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진단한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히틀러 최후의 14일/요아힘 페스트 지음·안인희 옮김/271쪽·1만2000원·교양인

최근 일본 정부의 검정에 합격한 일본 중학교 교과서들이 한일 관계사를 개악했고, 독도 영유권 주장도 한층 강화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런 움직임에는 일본 정부의 고위 관료나 정치인들이 직간접적으로 개입하고 있어 주변국들을 더욱 경악시키고 있다.

특히 일본 우익이 후원하는 후소샤 출판사의 역사교과서는 자국의 침략정책이 식민지의 근대화를 도왔다는 뻔뻔한 주장을 담았다. 1급 전범들의 위패를 모셔 놓고 국정 최고 책임자가 참배하는 이 나라는, 이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상임이사국 진출을 노리고 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의 반인류적 범죄에 책임을 자처한 독일의 오늘날 모습은 어떠한가.

2004년 9월, 독일 전역의 영화관에서 올리버 히르슈비겔 감독의 영화 ‘몰락’이 개봉됐다. 1945년 4월 16일 소련군의 베를린 총공세부터 같은 달 30일 히틀러가 벙커에서 자살하기까지 나치 지도부의 마지막 14일을 그린 이 영화는 처음부터 거센 반대의 목소리에 휩싸였다. “히틀러의 인간적 면모를 처음으로 상세히 묘사해 불필요한 연민의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 전범을 ‘너무 사실적으로’ 그렸다는 것만으로도 비판의 대상이 되는 나라. 철저한 전후 청산과 반성으로 유럽 내 지도국의 자리를 회복한 독일의 오늘이다.

독일의 저명한 역사가이자 저널리스트인 요아힘 페스트 씨가 쓴 이 책(원제 ‘몰락’·Der Untergang·2002년)은 히틀러의 타이피스트였던 트라우들 융게의 회고록과 함께 영화 ‘몰락’의 기초가 된 책이다. 저자는 1955년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총통 벙커’ 관계자들의 증언과 냉전 종식 이후 공개된 소련 측 자료를 정밀 비교해 14일 동안의 ‘멸망의 묵시록’을 파노라마처럼 펼쳐놓는다.

책장을 열면 맨 먼저 종말에 이른 독일군의 지리멸렬상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지도부는 ‘전선 사수’의 명령만 반복해 효과적인 방어망 구축에 거듭 실패하고 마지막 구원자라는 소문이 돌던 벵크 대장은 도주로를 확보하는 데만 골몰한다.

히틀러의 벙커 역시 그가 사랑했던 바그너의 음악극 ‘신들의 황혼’ 마지막 장면처럼 장엄하게 황혼을 맞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저자의 펜 끝은 목숨이 다한 제국의 후계 자리를 놓고 벌이는 2인자들의 암투, 서방 연합국들과 강화한 뒤 소련과 맞서자는 헛된 희망, ‘어차피 빼앗길 와인이라면 다 털어 마시자’는 암울한 분위기를 낱낱이 보여준다. 오랜 벙커생활로 얼굴이 짓무른 히틀러는 입가에 음식을 묻힌 채 손을 떨며 돌아다닌다.

벙커의 풍경이 극적으로 변하는 것은 히틀러의 생일인 20일. 모처럼 열린 주연으로 벙커는 달콤한 살롱 분위기까지 풍기지만 히틀러가 ‘떠나는 자를 막지 않겠다’고 말하자 즉시 탈출 행렬이 이어진다. 약탈과 거리 재판, 즉석 처형이 이어지는 광란 속에 9일이 흐르고 소련군의 총알이 벙커에 도달하자 히틀러는 연인이었던 에바 브라운과 결혼식을 올린다. 다음날 아침, 마지막으로 태양을 보겠다는 아내를 따라 잠시 벙커 바깥으로 얼굴을 내민 히틀러는 그녀에게 독을 먹인 뒤 권총으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쏜다.

저자는 히틀러의 마지막 나날을 몰아간 충동이 ‘몰락에의 의지’였다고 분석한다. 끊임없이 자극을 추구했던 그는 소련을 침공해 자신의 운명을 시험해야 했으며 결과는 이기든 지든 상관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전쟁이 시작되기도 전 “우리가 몰락한다면 세계의 절반을 함께 몰락으로 이끌고 갈 것”이라고 공언했으며 전쟁 말기에는 “퇴각할 때 모든 시설을 파괴하라. 문명의 폐허를 만들겠다”고 말하곤 했다.

이런 기이한 심리상태에도 불구하고 이 책과 영화 ‘몰락’에 나타난 히틀러는 개를 어루만지고 상심한 연인을 위로하는, 인간적 면모도 지니고 있었다. 영화가 받은 비난 역시 이 점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것이야말로 저자의 의도였을 듯하다.

모든 죄를 ‘우리와 다른’ 특별한 존재에게 돌린다고 우리가 양심의 가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것, 오직 끊임없는 숙고와 반성만이 인류를 비극으로부터 구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저자가 전하려는 메시지가 아닐까. 이 메시지야말로 극단적 민족주의를 주장하는 일본의 우익들이 새겨들어야 하지 않을까.

이달 30일은 히틀러가 벙커에서 ‘몰락’한 지 60주년이 되는 날이다.

유윤종 기자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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