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426>卷五.밀물과 썰물

  • 입력 2005년 4월 7일 18시 2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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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며칠이 지난 뒤였다. 다음 행정(行程)을 고심하던 한신이 광무군 이좌거를 불러 물었다.

“저는 북쪽으로 연(燕)나라를 치고 다시 동쪽으로 제(齊)나라까지 정벌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움직이려 하니 당장 어디로 어떻게 발길을 떼어놓아야 할지 실로 막막합니다. 선생(*원문은 足下)이 보시기에 제가 어찌 해야 공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좌거는 아직도 싸움에 지고 사로잡힌 충격에서 다 깨어나지 못한 듯했다. 겸손을 넘어 처연하게까지 보이는 얼굴로 대답했다.

“제가 들으니 ‘싸움에 진 장수는 용맹을 말하지 않고, 망한 나라에서 살아남은 대부는 나라 지켜내는 일을 꾀할 수 없다(敗軍之將 不可以言勇 亡國之大夫 不可以圖存)’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저는 싸움에 져서 망해버린 나라의 장수로 사로잡혀온 처지입니다. 어찌 대장군께서 그같이 큰일을 꾀하시는데 저 같은 것이 감히 거들 수 있겠습니까?”

“내가 들으니 백리해(百里奚=진 穆公을 도와 覇者가 되게 한 宰相)가 우(虞)나라에 있을 때는 우나라가 망하였고, 진(秦)나라에 있을 때는 진나라가 천하의 패자(覇者)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는 백리해가 우나라에 있을 때에는 어리석다가 진나라에 있을 때에는 슬기로워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나라 임금이 그를 써주었는지 아니었는지, 그의 계책을 들어주었는지 안 들어주었는지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만약 성안군 진여가 선생의 계책을 들었다면 저는 지금쯤 오히려 조나라의 포로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진여가 선생을 제대로 써주지 않았기 때문에 제가 이렇게 선생을 모시게 되었을 뿐입니다.”

한신이 그렇게 이좌거를 위로한 뒤에 자르듯 말했다.

“하지만 이제 저는 마음을 다하여 선생의 계책을 따를 것입니다. 부디 선생께서는 가르침을 아끼지 말아주십시오.”

그래도 한참이나 망설이던 이좌거가 이윽고 입을 떼어 조심조심 말하였다.

“제가 들으니 ‘슬기로운 사람의 천 번의 생각에도 한번의 실수가 있을 수 있고, 어리석은 사람의 천 가지 생각에도 한번은 맞는 것이 있다’ 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성인은 미치광이의 말도 가려서 듣는다’ 고 하였습니다. 저의 계책이 반드시 골라 쓸만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래도 대장군께서 물으시니 말하겠습니다.

저 성안군 진여는 백번 싸워 백번 이길 수 있는 계책이 있었는데도, 하루아침의 잘못으로 이끌던 군사는 호성(f城=배수진 부근의 성) 밑에서 산산조각이 나고 자신은 저수((저,지,치)水) 가에서 목을 잃었습니다. 지금 장군께서는 서하(西河)를 건너 위왕 표를 사로잡았으며, 하열을 연여(閼與)에서 죽였습니다. 단숨에 정형(井형) 험한 길을 빠져나온 뒤에, 한나절 싸움으로 조나라 20만 대군을 쳐부수어 그 위엄을 천하에 떨쳤습니다. 어리석은 농부들까지도 나라의 앞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여겨 농사를 그치고 쟁기를 내버린 채, 아름다운 옷에 맛난 음식을 먹으면서 오직 장군의 명에만 귀 기울이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은 대장군께 이로운 것이나, 백성들은 고단하고 군사들은 지쳐 있어 실은 그들을 부리기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이제 대장군께서는 고단한 백성들을 쥐어짜고 지친 군사들을 휘몰아 연나라의 높고 든든한 성 아래로 쳐들어가려 하십니다.”

거기서 이좌거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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