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 산책]과대망상 조폭 vs 기억상실 형사

  • 입력 2005년 4월 7일 16시 5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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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

조직폭력배 출신인 성공한 영화 제작자 칠리 파머(존 트래볼타)는 영화판에 염증을 느끼고 있다. 때마침 파머에게 무법천지인 음악 비즈니스계를 영화로 제작하자고 제안하던 친구 토미가 러시아 마피아에게 살해당한다. 부당한 전속계약 탓에 빛을 못 보던 여가수 린다를 첫눈에 알아본 파머는 음반업계에 뛰어들기로 결심한다. 그는 죽은 토미의 매력적인 아내 이디(우마 서먼)와 손잡고 린다 띄우기에 돌입한다.

8일 개봉되는 ‘쿨(Be Cool)’은 이야기만 놓고 보면 ‘쿨’한 영화가 아니다. 쇼 비즈니스계가 완력과 불평등 계약으로 얼룩져 있다는 ‘상식’ 이상의 얘기를 꺼내지 못하면서도, 영화는 수없이 많은 캐릭터들을 ‘인물 열전’ 마냥 나열하기 때문이다. 이 크고 작은 캐릭터들은 각기 크고 작은 에피소드를 끌어안은 채 이야기를 필요 이상 배배 꼬아놓는다.

하지만 ‘Be Cool(진정하라)’. 애당초 이 영화의 목적지는 ‘사공이 많아 배가 산으로 가는’ 바로 그 지점이기 때문이다. 인물들이 떼로 몰려다니며 만들어내는 왁자지껄한 분위기, 영화라기보다는 ‘쇼’ 같은 분위기, 그 자체를 즐기는 영화인 것이다. 영악한 주인공 파머를 제외한 대부분의 캐릭터들은 한껏 폼을 잡다가 자가당착에 빠져 우스꽝스러운 존재로 전락한다. 린다의 악덕 매니저 라지(빈스 본)는 백인이면서도 흑인으로 사는 게 꿈이고, 그의 근육질 보디가드인 엘리엇(더 록)은 동성애자에다 ‘상처받기 위해 태어난’ 배우지망생이며, 파머에게 빚 독촉을 해대는 프로듀서 신은 스스로도 음반제작자인지 조폭인지 헷갈려 한다.

이 영화는 본지보다 부록으로 승부하려는 여성잡지 같다. 록의 황태자 ‘에어로스미스’의 리드 싱어 스티븐 타일러가 ‘스티븐 타일러’ 역으로 깜짝 출연하고, 진정한 갱스터가 되기를 꿈꾸는 랩 그룹 리더는 그래미상을 수상한 ‘아웃캐스트’ 멤버 안드레 벤저민이다. 데니 드비토, 제임스 우드 같은 유명배우들도 잠깐 나왔다가 사라진다. 파머와 린다의 첫 만남 장소로 나오는 나이트 클럽 ‘바이퍼 룸’은 할리우드 스타 조니 뎁 소유로, 배우 리버 피닉스가 죽은 장소로 유명해진 곳. 물론 이런 것들은 아는 만큼 보인다. ‘펄프 픽션’ 이후 11년 만에 재회한 트래볼타와 서먼은 이번에도 속이 니글거리는 춤 솜씨를 보여주지만, ‘펄프 픽션’의 ‘게다리’ 춤에 비하면 한결 덜 치명적이다.

‘이탈리안 잡’의 게리 그레이 감독 연출. 15세 이상 관람 가.

◆블랙아웃

미국 샌프란시스코 주 경찰서 강력반 여성 경관인 제시카(애슐리 주드)는 경찰인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이고 자살했던 끔찍한 과거에 시달린다. 연쇄 살인사건이 터진다. 피해자들은 모두 남성. 하나같이 손등에서 담뱃불로 지진 흔적이 발견된다.

이들이 제시카와 하룻밤을 보낸 남자들이란 사실이 밝혀지지만, 제시카는 사건 발생 때의 기억이 없어 혼란에 빠진다. 아버지의 옛 동료로 제시카를 키운 경찰 간부 존 밀스(사무엘 잭슨)는 제시카의 경찰 파트너 마이크(앤디 가르시아)를 의심한다.

8일 개봉되는 ‘블랙아웃(twisted)’은 미스터리 스릴러로서 없는 게 없다. A급(엄밀히는 A마이너스급)의 안정된 배역들에다 주인공의 무의식에 뿌리내린 악몽의 기억,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벌이는 혼잡한 섹스, 적당한 폭력, 그리고 범인은 늘 가까운 곳에 있다는 ‘최측근의 법칙’까지.

하지만 훌륭한 재료가 훌륭한 요리를 100% 보장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프라하의 봄’을 연출한 필립 카우프먼 감독은 이 영화에서 결정적으로 ‘레시피’(요리 노하우) 부족을 드러낸다.

‘블랙아웃’의 문제는 실제론 말할 게 몇 가지 없으면서도 마치 너무 많은 말을 해 경황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데 있다.

이는 제시카의 트라우마(과거의 충격적 경험이 지금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라는 ‘안’의 사건과 연쇄살인이라는 ‘밖’의 사건이 시종 긴밀하게 대화하도록 설계하는 데 실패한 탓이다. 살인 사건 중심으로 긴박하게 전개되던 영화는 중반 이후 제시카의 의식의 흐름 속으로 쑥 들어가 버리는 방식으로 선로를 변경함으로써 스릴러의 탄력과 집중력을 상실한다. 클라이맥스 지점을 향해 돌진할수록 긴장은 반대로 이완되고, 범인의 정체가 밝혀지지만 주인공의 트라우마가 왠지 석연치 않게 해소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물론 그녀라면 모든 걸 용서하고 싶을 정도로 주인공을 열연한 주드는 지적이고 섹시하며 무게감이 있다. 하지만 제 몸에 착 달라붙는 영화를 만나지 못해 뜰 듯 뜰 듯하다 수면 밑으로 점차 가라앉는 그녀의 운명곡선은 이 영화만큼이나 안타깝다. 15세 이상 관람 가.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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