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음악 기행]장중한 오르간음악…‘독일 뤼베크’

  • 입력 2005년 4월 7일 16시 5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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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스테후데의 음악을 듣기위해 바흐가 먼길을 걸어서 찾아왔던 독일 북부 뤼베크의 성모 마리아 교회. 사진 정태남 씨
북스테후데의 음악을 듣기위해 바흐가 먼길을 걸어서 찾아왔던 독일 북부 뤼베크의 성모 마리아 교회. 사진 정태남 씨
《다소 허름한 뤼베크역. 역구내 관광안내소에서 시내지도를 한 장 달라고 하니 무료가 아니라고 한다. 사는 척하고는 지도를 쭉 훑어 본 다음 되돌려주었다. 안내 아가씨는 “뤼베크를 처음 방문한다면 이 지도가 필요할 것”이라며 의아해 하지만 “머릿속에 다 넣었다”고 대답했다. 그랬다. 한때 크게 번영하던 한자동맹 도시이며 소설가 토마스 만의 고향인 뤼베크는 현재 인구 20여만 명의 소도시에 불과하다. 특히 운하로 둘러져 있는 구시가지는 걸어서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작다. 고딕건축으로 유명한 성모 마리아 교회나 성 야코프 교회의 높은 종탑은 구시가지 어디에서나 보이기 때문에 굳이 지도가 필요하지 않다.》

○ 성모 마리아 교회 세계최대 오르간 자랑

역에서 나와 홀스타인 성문을 거쳐 성모 마리아 교회로 발길을 향한다. 이 교회는 1250년에 착공되어 1350년에 완성된 유서 깊은 북부독일식 고딕건축이다.

교회 안에는 누가 연주하는지는 모르지만, 바흐의 오르간 명곡 ‘토카타와 푸가 d단조 BWV 565’가 공간 구석구석 장중하게 울려 퍼진다. 바닥에 떨어진 채로 보존된 부서진 종에 시선이 멈춘다. 더 이상 울리지 않는 부서진 종은 지난날의 비극을 상기시키는 듯하다.

1942년 3월 29일, 부활절을 1주일 앞둔 종려주일 밤, 뤼베크는 마치 최후의 심판을 받는 듯 하늘로부터 불세례를 받았다. 연합군의 폭격으로 이 교회를 비롯하여 뤼베크 시가지의 5분의 1이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했다.

이 교회가 자랑하던 수백 년 된 오르간도 하룻밤 사이에 사라지고 말았다. 전쟁이 끝난 후 이 교회는 급속도로 복구되었고 불타 없어진 오르간 자리에는 1968년 제작된 세계최대의 오르간이 설치되어 있다. 오르간의 가장 긴 파이프는 자그마치 11m나 된다.

이 거대한 오르간이 제작되기 300년 전인 1668년, 이 교회의 오르간 주자로 덴마크에서 건너온 31세의 디트리시 북스테후데가 임명되었다. ‘북스테후데’는 함부르크 근교의 지명(地名)이니, 그의 조상은 독일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당시 이 교회는 북부독일의 프로테스탄트 음악의 요람으로, 오르간 주자 자리는 지금으로 치면 세계적인 교향악단의 지휘자와 다름없었다. 그런데 어떤 이유인지 모르지만, 이 교회의 오르간 주자 자리를 맡으려면 전임자의 딸과 결혼해야 하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북스테후데는 전임자 프란츠 툰더의 딸 중에서 미모가 뛰어난 막내딸과 결혼하고 오르간 주자의 자리를 물려받았으니 다른 음악가들이 몹시 부러워하는 행운아였던 셈이다.

○ 북스테후데 연주에 반해 400km 걸어온 바흐

신임 북스테후데는 오르간 음악에 있어서 내면적 정서를 간직한 극적이고 환상적인 작품을 썼다. 또 그의 오르간 연주 실력은 신기에 가까웠기 때문에 모든 독일 음악가들이 꼭 한번 듣고 싶어 했다.

그는 전임자가 1646년부터 이 교회에서 목요일마다 개최하던 ‘저녁 음악회’를 크리스마스 이전 다섯 번째 일요일 오후로 바꾸고, 1673년부터는 대규모 행사로 확대했다.

이 음악회를 한번 보려고 독일 각지에서 음악가들이 몰려왔는데 그중에는 20세의 청년 바흐도 있었다. 1705년 10월, 튀링엔의 소도시 아른슈타트에서 오르간 주자로 봉직하던 바흐는 4주간의 휴가를 얻어 자그마치 400km가 넘는 먼 길을 걸어서 왔던 것이다. 음악을 재생하는 기술이 없던 당시, 직접 현장에 가서 음악을 듣는 수밖에 없었겠지만.

바흐는 이곳에서 북스테후데의 완벽한 연주와 장려한 음악을 깊게 맛보았다. 바흐는 이곳에서 성모 마리아 교회의 오르간 주자 자리를 꿈꾸었으며, 그의 실력을 알아본 북스테후데로부터 자기의 후임이 되지 않겠느냐는 제의도 받았다. 하지만 바흐에게는 이곳의 관례에 따라 북스테후데의 딸과 결혼해야한다는 조건이 너무나 큰 걸림돌이었다. 북스테후데의 딸은 매력이라곤 전혀 없었던 데다가 당시 기준으로는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나이 서른의 노처녀였으니…. 또 바흐는 사촌동생 바르바라와 이미 사랑에 빠져있던 상태.

어쨌든 바흐는 북스테후데의 음악에 빠져 무단결근도 아랑곳하지 않고 4개월이나 뤼베크에서 체류한 후에 아른슈타트로 돌아갔다. 사랑하는 바르바라를 다시 보게 된다는 기대감과 북스테후데의 작풍을 터득한 만족감 때문에 돌아가는 발걸음은 가벼웠을 것이다(사실 바흐는 그의 작품을 반 이상 베껴갔다).

바흐의 불후의 오르간 명곡 ‘토카타와 푸가 d단조 BWV 565’는 바로 이 뤼베크에서 북스테후데를 만난 다음에 작곡된 것이다.

정태남 재이탈리아 건축가 www.tainam-jung.com

▼동갑내기 바흐와 헨델, 뤼베크 교회서 만날뻔▼

바로크 시대의 두 사람의 대음악가 바흐와 헨델은 같은 해에 태어났고 두 사람의 출생지도 그리 멀지 않은 아이제나흐와 할레이지만, 평생 서로 만나본 적이 없었다. 바흐와 헨델은 성모 마리아 교회를 찾았지만, 서로 만날 운명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당시 함부르크에서 활동하던 헨델은 북스테후데의 음악회를 보려고 바흐가 오기 1년 전에 이미 이곳을 다녀갔던 것.

한편 헨델도 성모 마리아 교회의 오르간 주자가 되기를 희망했으나 북스테후데의 딸과 결혼해야 한다는 계약서를 읽고는 기겁을 하고 줄행랑을 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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