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파격적 퍼포먼스로 미술계 신선한 바람 낸시 랭

  • 입력 2005년 4월 7일 16시 5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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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교의 여왕’ 아티스트 낸시 랭이 자신의 대표작인 ‘터부 요기니’ 시리즈 앞에서 작품에 등장하는 건담 로봇을 들고 있다. 강병기 기자
‘애교의 여왕’ 아티스트 낸시 랭이 자신의 대표작인 ‘터부 요기니’ 시리즈 앞에서 작품에 등장하는 건담 로봇을 들고 있다. 강병기 기자
《파격적인 퍼포먼스와 개성 있는 평면작업으로 미술계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아티스트 낸시 랭(박혜령)을 만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는 약속 시간을 세 번이나 미룬 끝에 서울 서초구 양재동의 작업실 근처에서 만나자고 했다. 약속시간 10분 전부터 기다렸지만 30분이 지나도 그는 오지 않았다. 꽃샘추위 때문에 바람이 쌩쌩 불던 날이라 오들오들 떨면서 기다리다 보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확 가버릴까 생각하고 있는데 깜찍한 얼굴에 빵빵한 몸매의 아가씨가 미안해 죽겠다는 듯한 웃음을 띠고 깡충깡충 뛰어온다. 그러더니 너무 자연스럽게 처음 보는 이의 팔짱을 끼며 코맹맹이 소리로 “앙, 너무 미안해요”를 연발한다. 손을 덥석 잡으며 “내가 너무 기다리게 했나 보다, 아이 차가워” 하더니 급기야 얼굴을 바짝 들이밀고 그 큰 눈을 강아지처럼 깜빡거리며 애절하게 말한다. “아아, 날 미워하지 말아줘요.”

“푸하하하.” 웃을 수밖에 없었다. 같은 여자인데도 그 애교에는 별 대책이 없었다.》

○ 아티스트 낸시 랭

낸시 랭은 뉴욕에서 태어나 홍익대 미대 서양화과와 대학원을 졸업했다. 그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2003년 ‘꿈과 갈등’을 주제로 했던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한 퍼포먼스 때문이었다. 초대받지도 않은 무명작가인 낸시 랭은 빨간 빅토리아 시크릿 란제리에 하얀 가부키 화장을 하고 바이올린을 연주했다. 어릴 적 바이올리니스트가 되고 싶었다는 낸시 랭의 꿈과 지금의 현실 사이의 갈등을 표현한 것. 이 특이한 퍼포먼스 덕분에 낸시 랭은 세계적으로 주목받게 됐다.

작년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는 비키니 차림으로 관객을 향해 오일을 발라 달라는 등 애교를 떨다가 노래방 기계에 맞춰 ‘보랏빛 향기’를 부르는 퍼포먼스를 하기도 했다. 점잖은 한국인들을 당황하게 하는 도발적이고 애교스러운 그의 퍼포먼스에 많은 사람들이 열광했다.

계원조형예술대 유진상 교수는 “한국인이 가장 두려워하는 성적 표현마저 매우 순진하고 우호적인 놀이로 바꾸어버리는 낸시 랭의 개방성과 친근함은 도저히 이 지역의 것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자연스러움을 보여 준다”고 지적했다.

퍼포먼스로 알려졌지만 사실 낸시 랭은 다양한 현대미술 분야를 아우르는 말 그대로 ‘아티스트’다. 자신을 소개할 때도 항상 “안녕하세요? 아티스트 낸시 랭이에요”라고 말한다.

그의 작품에는 ‘터부 요기니’라는 이름의 캐릭터가 일관되게 등장한다. 잔다르크 같은 여전사의 이미지로 ‘금기시되는 신적 존재’를 의미하는 터부 요기니의 목적은 ‘퇴색된 꿈을 이루어주는 것’이다. 터부 요기니는 로봇의 몸체에 인형 같은 얼굴을 하고 몸속 내장기관으로 만들어진 날개를 달고 있다. 세상의 모습이 여성의 신체에 들어가 있는 듯하다. 예일대 로고를 거꾸로 한 모자에 루이비통 가방을 들기도 했다.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물질만능주의와 지식에 대한 욕망을 비판하는 것이라 해석한다.

“그냥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에요. 난 명품 가방도 좋아하고 엘리트적인 것도 좋아해요. 무척 세속적이죠. 사람들도 다 그런 것을 좋아하면서 아닌 척하잖아요. 그렇지만 내 작품이 그런 것을 비판하는 매개체도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해석도 틀리지 않는다는 거죠.”

낸시 랭은 8일부터 다음 달 4일까지 청담동 갤러리 드맹(02-543-8485)에서 개인전을 연다. 비정기적으로 발행되는 ‘매거진 낸시 랭’의 창간 기념회도 갖는다.

○ 애교의 여왕 낸시 랭

그가 더욱 유명하게 된 것은 청담동에서 ‘애교의 여왕’으로 이름을 떨친다는 점이다. 누구든 그를 만나면 혼이 쏙 빠지고 만다. 음주가무의 달인인 그와 술자리를 갖는다면 건배하며 그가 정한 구호인 ‘큐티 섹시 키티 낸시!’를 외쳐야 하며 ‘원샷’을 한 뒤 그가 내는 고양이 울음소리와 환희에 찬 표정을 보며 배꼽을 쥘 준비를 해야 한다.

“사실 전 독실한 크리스천이거든요. 하나님한테도 막 애교를 부리고 싶다고요.”

애교라는 것은 보통 강한 자에게 꼬리를 치는 약자의 처세 방식처럼 느껴지지만 낸시 랭의 애교에 남녀 가리지 않고 정신을 못 차리는 걸 보면 그의 애교는 강력한 사회적 무기처럼 느껴진다.

한없이 천진난만하고 발랄한 성격 때문에 철없는 부잣집 아가씨인 줄만 알았다. 그러나 국제적인 사업가였던 어머니 밑에서 부러운 것 없이 자랐던 낸시 랭은 대학교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병에 걸려 사업을 접게 되면서 학비를 못 낼 정도까지 갔었다고 말한다.

퍼포먼스를 시작하게 된 것도 미술을 포기할 수는 없는데 그나마 그게 돈이 가장 적게 들 것 같아서였다고.

대부분의 작품이 팔려나간 인기작가인 지금도 지하철을 타고 다닌다는 낸시 랭은 보기보다 야무지고 단단했다.

“뭔가 얻어내기 위해 어두운 목적을 가지고 애교를 떠는 게 아니잖아요. 그냥 그 사람이 좋아서 이유 없이 다가가는 것이니 별로 싫어하지 않는 것 같아요.”

물론 “뭐 저런 애가 다 있냐”, “재수 없다”는 반응도 있다. 그의 예술에 대해서도 얼굴과 몸으로 승부한다는 평가도 있다.

“현대미술은 정답이 없는 거죠. 각자 취향일 뿐. 난 너무 바쁘고 목표와 꿈이 있고 계속 ‘run, run, run’ 해야 한다고요. 그런 거 신경 쓸 틈이 없어요.”

예술가에 대한 편견을 깨고 엄숙하고 고지식한 사람들을 당황하게 하고 자유분방한 사람들에겐 쾌감과 대리만족을 주는 낸시 랭은 천사와 악마의 모습을 동시에 가진 터부 요기니, 그 자체다.

낸시 랭의 작품은 그의 홈페이지(www.nancylang.com)에서 볼 수 있다.

채지영 기자 yourcat@donga.com

▼낸시 랭이 말하는 애교의 기술▼

1. 애교의 핵심은 속칭 ‘선빵’이다. 먼저 좋아하는 사람에게 다가가서 꼬리치며 ‘난 네가 좋아’ 하며 웃어 주라.

2. ‘나를 재수 없게 생각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을 버려라. ‘Just be yourself!’

3. 눈과 입이 한꺼번에 웃는 밝은 표정은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마력이 있다.

4. 한결같은 모습을 보여라. “쟤 연기하는 거야”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한결같은 모습에는 넘어가게 돼 있다.

5. 물론 낸시 랭의 ‘오버 애교’는 그가 아티스트라는 자유로운 직업을 가졌기에 가능한 것. 상황과 대상에 맞게 수위조절이 필요하다. 아무 때, 아무한테나 그러다간 ‘왕따’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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