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에 논 뺏기고… 산불에 집 뺏기고…

  • 입력 2005년 4월 7일 02시 4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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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불이 휩쓸고 간 강원 양양군 양양읍 화일리, 강현면 물갑리 등 17개 피해 마을에서는 6일 동이 트자마자 잔불 처리와 함께 복구 작업이 시작됐다.

그러나 양양군 내 전체 피해 가옥 1082채 중 169채가 전소됐을 만큼 피해가 커 복구에는 오랜 시일이 걸릴 전망이다. 특히 2002년 태풍 피해를 보았던 마을들이 다시 피해를 봐 주민들은 상실감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강현면 용호리 마을회관 1층에는 이날 아침부터 20여 명의 주민이 모여 소주잔을 들이켜고 있었다.

마을회관 2층에서는 10여 명의 국군강릉병원 의무관과 강릉아산병원 의료진이 아침 일찍 임시진료소를 설치하고 주민들을 상대로 무료 진료를 벌이고 있었다. 화상으로 고생하던 마을 어른들은 고맙다는 말 대신 눈물만 흘렸다.

평생을 살아 온 집을 날려 버렸다는 김창영(69) 씨는 “지난번엔 태풍이 내 논을 뺏어 가더니 이번엔 산불이 내 집을 뺏어 가 버렸다”며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3년 전 태풍 ‘루사’로 온 마을의 논과 밭이 물에 잠겼던 용호리는 이번 화재로 64채 중 35채가 전소됐다.

마을회관 뒤에 살고 있는 전일우(39), 박순희(36·여) 씨 부부는 무너진 집 앞에 앉아 타고 남은 검은 재를 젓가락으로 뒤지고 있었다.

박 씨는 “혹시 애들 돌 반지와 결혼 패물 등 금붙이가 남아 있지 않을까 해서 몇 시간째 찾고 있지만 성과가 없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매년 관광객이 일본에서 찾아올 만큼 깊은 향과 맛으로 유명했던 이 지역 특산물 ‘송이버섯’도 큰 피해를 보았다. 버섯으로 유명한 양양읍 화일리와 거마리 일대 5만여 평의 소나무 산은 검은 재로 변해 있었다.

몇 대째 송이농사를 지어 온 4000여 평의 산이 모두 탄 김남범(64) 씨는 “1980년 쯤 뒷산에 작은 산불이 난 뒤 지금까지 그 산에서 단 한 개의 송이버섯도 나지 않았다”며 “이번 화재로 이 일대에서 한 50년간은 송이버섯 구경도 못하게 생겼다”고 한숨을 쉬었다.

한편 이날 오후부터 대한적십자사 등 민간구호단체와 군부대 장병들이 각 마을을 돌며 생필품을 나눠주거나 도로정비 등 복구 작업에 나섰다.

양양읍 기정리에서는 육군 8군단 소속 군인 200여 명이 투입돼 잔불 처리와 함께 재와 쓰레기로 막혀 있던 길을 트는 작업을 했다. 막혀 있던 마을길이 열리고 화재로 타버린 집 주변이 정리되자 폭격을 맞은 듯하던 마을은 한결 정돈된 모습을 되찾았다.

양양=동정민 기자 ditto@donga.com

김재영 기자 jaykim@donga.com

10m 불덩이에 소방차 녹아내려… 불길 뚫고 극적 탈출

소방관들 아찔했던 순간

“소방차 안에서 완전히 ‘통닭구이’가 될 뻔했어요.”

6일 강원 양양군 낙산사에서 만난 원우식(33) 소방관은 5일 화재로 전소한 원통보전(강원도 유형문화재 35호) 앞에 남아 있는 소방펌프차의 처참한 잔해를 보며 떨리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산불로부터 낙산사를 지키기 위해 이날 오전 낙산사에 투입된 원 대원 등 4명의 소방대원은 이날 오후 불길에 갇혀 죽을 고비를 넘겨야 했다. 이들을 구출하러 왔던 문상호(51) 강원소방본부장과 김국현(52) 속초소방서장 등 다른 대원 9명도 모두 불길에 휩싸여 몰살될 뻔했다. 불과 50분 사이에 물탱크차 1대, 펌프차 2대 등 3대의 소방차가 녹아 버린 긴박한 순간들이었다.

원 소방관은 이날 오후 낙산사를 덮친 불길을 “완전히 ‘불 쓰나미(지진해일)’였다”고 표현했다.

“오후 3시경 갑자기 닥친 시커먼 연기구름이 커튼처럼 올라가더니 시뻘건 불덩이가 10여 m 높이의 파도처럼 들이닥쳤어요. 물을 뿌렸지만 거짓말처럼 공중에서 모두 증발해 버리더군요.”

불길은 물기가 닿지 않은 20여 m 높이의 소나무 꼭대기에 옮겨 붙더니 순식간에 바람을 타고 10여 m 떨어진 목조 건물을 덮쳤다. 사방에 ‘불구름 다리’가 생겼다. 소방차량은 이미 뜨거운 열기에 녹아 내리고 있었다.

낙산사 밖에 있던 문 본부장 등 6명이 지휘차량과 펌프차량에 나눠 타고 긴급히 달려왔지만 이미 사찰 입구 홍예문(강원도 유형문화재 33호)도 불길에 덮여 있었다.

문 본부장은 홍예문 돌다리 밑으로 빠져나온 스님 등 민간인 7명을 지휘차량에 태워 안전지대로 이동시켰고, 그 사이 나머지 대원들은 물을 뿌리며 퇴로를 확보했다. 지휘차량이 다시 돌아왔을 땐 이미 홍예문 일대가 불길에 에워싸여 장남중(39) 소방관 등 3명이 불속에 추가로 고립돼 있었다.

이 사이 원통보전에 고립됐던 원 소방관 등 4명이 돌담길을 타고 홍예문까지 나왔다. 하지만 밖으로 나갈 길이 모두 불길에 막혀 버려 다들 일단 물로 주변 땅을 적시고 온몸에 물을 뿌린 채 버텨야 했다. 그러나 곧 차량이 녹아 내리면서 물펌프도 더 이상 쓸 수 없게 됐다.

장 소방관은 “그런 극한 상황에서도 계속 목탁을 치고 염불하시던 스님 덕분인지 갑자기 바람이 멎고 잠깐 탈출구가 보였다”며 “이를 악물고 홍예문 밖으로 달려나가 불길 바로 앞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지휘차량에 올라 탈 수 있었다”고 말했다.

양양=김재영 기자 jay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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