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422>卷五.밀물과 썰물

  • 입력 2005년 4월 3일 17시 2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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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조나라 장졸들은 어서 항복하라! 대장군의 명을 받든 우리 3만 군사가 이곳을 차지하고 너희를 기다린 지 오래다.”

“진여야, 더는 가엾은 장졸들을 죽이지 말고 어리석은 그 목을 내놓아라.”

방금 호되게 당하고 쫓겨온 뒤인데다 너무도 뜻밖이라, 제법 눈 밝다 소리를 듣는 진여도 실상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다. 정말로 적 몇만 대군이 진채를 차지하고 있는 듯 보였다. 조나라 군사들은 더했다. 그래도 마지막 의지할 곳으로 믿고 찾아온 진채가 벌써 적에게 넘어갔다는 걸 알자 맥부터 빠졌다.

그때 다시 뒤쫓던 한군이 그곳에 이르러 갈팡질팡하며 웅성대는 조군의 후미를 들이쳤다. 그렇게 되자 싸움이고 뭐고 없었다. 놀라고 겁에 질린 10여만 조군(趙軍)은 거대한 모래산이 무너져 내리듯 싸워볼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스스로 무너져 내렸다.

“속지 말라! 적은 얼마 되지 않는다. 선두는 그대로 밀고 나가 진채를 되찾고, 나머지는 모두 돌아서서 적을 막아라.”

진여가 억지로 용기를 짜내 그렇게 소리쳤으나 소용이 없었다. 아무도 그 외침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그저 어쩔 줄 몰라 하며 허둥댈 뿐이었다. 어느새 진여는 자신이 두려움과 혼란으로 진흙탕처럼 엉겨버린 대군 사이에 외로운 섬처럼 남겨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때 그 진흙탕을 가르듯 한 갈래 한군이 똑바로 진여를 향해 다가들며 앞선 장수가 소리쳤다.

“이놈 진여야, 어서 말에서 내려 항복하지 못하겠느냐?”

귀에 익은 그 목소리에 놀라 바라보니 바로 장이였다. 큰 칼을 빼들고 앞장서 말을 몰고 나오는 게 쉰을 넘긴 나이답지 않게 씩씩하고 힘차 보였다. 하지만 그때의 진여에게는 그런 장이가 세상의 그 무엇보다 무섭고 싫은 상대였다. 감히 맞서지 못하고 그대로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승상이자 대장군 격인 진여가 달아나자 조군은 더욱 걷잡을 수 없이 무너졌다. 그나마 달아나 뒷날을 기약하려는 장졸은 얼마 되지 않고, 대개는 무기를 내던지고 그 자리에 털썩 털썩 무릎을 꿇으며 항복의 뜻을 드러냈다.

“항복하는 자는 죽이지 마라. 그러나 맞서거나 달아나려는 자는 하나도 남겨두지 마라. 끝까지 뒤쫓아 죽여 버려라!”

한신이 전에 없이 비정한 명을 내렸다. 이참에 조나라가 재기(再起)할 싹까지 아주 잘라버리려는 심산 같았다. 거기다가 장이가 뼛속 깊이 스민 원한으로 이를 악물고 뒤쫓으니 진여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달아날 수가 없었다. 겨우 수십 기(騎)만 거느리고 달아나다 마침내는 저수((저,지,치)水)가에서 사로잡히고 말았다.

“이제 내 너를 어찌하면 좋겠느냐?”

끌려온 진여를 보고 장이가 착잡한 듯 물었다. 이를 갈며 복수를 별러 왔으나, 막상 초라하게 사로잡혀 끌려온 모습을 보자 생사를 함께하던 시절의 옛정이 불쑥 되살아난 탓이었다.

“싸움에 진 장수에게 달리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 다만 구구하게 목숨을 빌지는 않겠다.”

이미 죽기를 각오한 듯 진여가 차게 받았다. 그때 아장(亞將) 하나가 달려와 말했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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