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바람의 그림자’…‘책의 묘지’서 들고온 소설속…

  • 입력 2005년 4월 1일 19시 1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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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그림자’의 스페인어판과 한국어판에 사용된 표지 이미지. 소설의 도입부에 소년 다니엘이 아버지의 손을 잡고 ‘잊혀진 책들의 묘지’로 향하고 있는 듯한 풍경을 담았다. 사진 제공 문학과지성사
‘바람의 그림자’의 스페인어판과 한국어판에 사용된 표지 이미지. 소설의 도입부에 소년 다니엘이 아버지의 손을 잡고 ‘잊혀진 책들의 묘지’로 향하고 있는 듯한 풍경을 담았다. 사진 제공 문학과지성사
◇바람의 그림자/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지음·정동섭 옮김/1권 392쪽·2권 396쪽·각권 1만 원·문학과지성사

카를로스 사폰(41)은 스페인 바로셀로나에서 자랐다. 미국에서 시나리오를 쓰기도 했으며 오손 웰스 감독을 영웅으로 생각해 왔다. 그는 ‘자정의 왕궁’ ‘9월의 빛’ 같은 어린이소설로 꽤 인기를 끌었는데 본격 소설로는 처음 쓴 이 작품 ‘바람의 그림자’로 2000년 페르난도 라라 소설문학상에 응모했다가 쓴잔을 마셨다. 그런데 이듬해 책으로 펴낸 뒤 이변이 일어났다. 이 책은 밀리언셀러가 됐으며 지금도 스페인 베스트셀러 1위다. 20개국 언어로도 번역됐다.

사폰은 취미 삼아 400개가 넘는 용(龍) 조각을 모아 왔는데 ‘바람의 그림자’는 안개 속에 몸을 감추고 있는 용의 분위기를 지녔다고 볼 수 있다. 이야기가 환상적이고 신비스러우면서도, 느린 듯 힘이 있기 때문이다. 스페인어권 문학의 환상적 사실주의와 미스터리 스릴러 영화 같은 요소가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작품이다.

1945년 여름 소년 다니엘은 전쟁의 상처가 아물어 가는 바르셀로나의 새벽 거리로 헌 책방을 하는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나온다. 아버지는 왕궁의 잔해 같은 미명 속의 건물로 들어가더니 희귀한 고서적들이 안치돼 있는 ‘잊혀진 책들의 묘지’ 앞에 선다. 다니엘은 거기서 훌리안 카락스라는 사내가 쓴 ‘바람의 그림자’라는 소설을 들고 나오는데, 바깥세상에선 이 소설이 누군가에 의해 차례차례 불살라지고 이제는 다니엘이 손에 쥔 것만이 유일함을 알게 된다.

“누가 왜 그런 짓을 해 온 걸까? 훌리안 카락스라는 작가가 문제였던 걸까?”

다니엘은 카락스와 그의 연인이었던 페넬로페가 속한 알다야 가문의 악연을 향해 접근한다. 거부인 알다야 가문의 결혼 반대에 부닥친 카락스와 페넬로페는 파리로 달아나기로 하는데 페넬로페만 막판에 붙들리고 말았다. 이 와중에 살인청부업자인 푸메로 경위가 카락스의 목숨을 노리고, 카락스의 친구들이 차례로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다니엘은 화해할 수 없는 두 사람 카락스와 푸메로가 본모습을 감춘 채 아직도 살아 있음을 알게 된다.

미로와 같은 회랑의 이미지가 이 작품의 곳곳에 나타난다. 희미한 빛이 돌 벽을 비추고 있는 오래된 책의 납골당, 열대의 견본 식물과 잎이 무성한 나무들로 가득한 유리 온실 속의 길 등이 그렇다. 더 나아가 바르셀로나라는 도시 자체가 신비하게 그려진다. 사람들의 대화와 움직임은 현실적이면서도, 그들이 찾아가고 사랑을 나누고 유혈극을 벌이는 장소들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처럼 묘사된다.

기괴한 소설의 요소, 어린 소년이 극적인 사건을 겪으면서 자라는 성장소설의 요소, 설렘과 회한이 교차하는 연애소설의 요소가 섞여 있는 작품이다. 용이 그렇지 않은가. 뿔이 있는가 하면 비늘이 있고, 네 발이 달렸는가 하면 하늘로 날아오를 수도 있으니.

권기태 기자 k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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