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시인 60주기…生의 마지막 현장 교토를 가다

  • 입력 2005년 1월 19일 17시 5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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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교토(京都)시내를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가모가와(鴨川) 강은 시인 정지용의 시 ‘압천(鴨川)’의 무대가 된 곳이다. 시인은 강가를 거닐며 ‘십리ㅅ벌에 해는 저믈어… 저믈어…’로 시작하는 ‘압천’을 지었다. 그를 가장 좋아하던 후배 시인들 중 한 명이 윤동주다. 습작 시절 ‘압천’ 시 옆에 ‘걸작(傑作)’이라 써 놓았던 윤동주는 청년이 되어 선배가 걸었던 강가를 거닐며 식민지 지식인의 울분을 달랬다. 한국 근대 문인들과 인연이 깊은 교토는 윤동주가 투옥되기 전 생의 마지막을 보낸 곳이기도 하다. 윤동주는 이 곳 도시샤(同志社) 대학 영문과에서 수학하다 체포되어 결국 고향 땅을 밟지 못했다.

겨울답지 않은 따뜻한 날씨가 이어진 이달 초, 도시샤 대학을 찾았다. 대학 캠퍼스를 돌아보던 중 윤동주의 흔적을 한 눈에 느낄 수 있는 시비(詩碑)가 눈길을 끌었다. 일본 국보로 지정된 예배당과 해리스기념관 사이에 세워진 시비는 쉽게 눈에 띈다. 유학생 이상경 씨(38·신학과 박사과정)는 “저명한 문인과 학자들을 배출한 유서 깊은 이 대학이, 설립자 동상조차 없는 이 곳에, 그것도 외국인의 시비를 세웠다는 것은 그 자체로 굉장한 일”이라고 전했다.

미션스쿨이지만, ‘종교인이 아닌 양심인을 키우겠다’는 대학 설립 취지와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로 시작하는 윤동주의 ‘서시(序詩)’가 잘 어울리는 듯하다. 정갈하게 단장된 정원 한 가운데 서 있는 가로 1m, 세로 85cm 시비에는 ‘서시’가 윤동주의 한글 친필과 일본어로 새겨져 있다. 이 시비는 10년 전, 도시샤 대 개교 120주년을 맞아 한국인 동문들이 주축이 되어 세운 것이다.

교토에서 윤동주는 국적과 시대를 뛰어 넘어 세계적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를 추모하고 연구하는 사람들은 지식인은 물론, 일반시민들까지 다양하다. 학원 영어강사인 하야시 시게루 씨(60)는 집 서재에 윤동주의 시 전집과 평전, 그의 문학세계를 다룬 한국 문예지와 평론서들을 빼곡히 채워놓고 있었다. 윤동주에 관한 소논문까지 썼던 그는 “고인의 시어는 민족이나 시대를 넘어,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할 지 끊임없이 일깨우는 깨달음의 언어”라고 말했다.

교토는 사후(死後)의 윤동주에게 영광의 땅이 되었지만, 생전에는 지옥의 땅이었다. 1942년 10월 도시샤대학에 편입학한 그는 이듬해 7월 ‘독립운동 죄’로 하숙집에서 체포되어 시모가모(下鴨) 경찰서에 감금되었다. 이 경찰서는 지금도 가모가와 강 근처 대로변에 남아 있다. 말끔하고 번듯한 현대식 건물에 ‘下鴨警察署(하압경찰서)’라는 간판이 선명하게 걸려 있다.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윤동주가 살던 하숙집 터가 있다. 제법 큰 아파트 건물이었으나 화재로 자취를 감추고 지금은 ‘경도예술단대’(京都藝術短大)’로 바뀌어 있다.

교토 재판소에서 2년형을 선고받은 윤동주는 1944년 후쿠오카(福岡) 형무소로 이송됐다. 좁은 독방 안에서 강제 노역을 하며 징역을 살던 그는 광복을 불과 여섯 달 앞둔 1945년 2월 16일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절명했다. 만 27세 2개월의 꽃다운 나이였다.

그의 서거 60주기를 맞는 올해, 도시샤 대학은 한국 유학생들과 함께 대대적인 그의 추모 행사를 마련한다. 유쿠지 오키타 교수(국제센터소장)는 “한류(韓流) 열풍으로 한일관계가 어느 때보다도 각별한 요즘, 가혹했던 시대에 지순하고 맑은 영혼으로 시대를 정화했던 윤동주의 정신은 오늘날 한일관계를 새롭게 여는 데도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식민과 제국, 광복과 패전, 전쟁피해와 배상 등 오늘날까지 다사다난하게 이어지고 있는 한국과 일본의 관계는 ‘교토의 윤동주’를 화두로 또 다른 장으로 접어들고 있다.


도쿄=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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