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5년사 쟁점 재조명]<1부>(17)삼상회의 보도

  • 입력 2004년 12월 12일 18시 5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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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탁 vs 찬탁1945년 12월 28일 한반도 신탁통치안이 포함된 모스크바 3국 외무장관회의 결정이 발표되자 반탁운동(왼쪽)이 거족적으로 확산됐다. 자연발생적인 반탁운동 초기엔 좌익도 동참했다. 그러나 소련의 지령을 받은 조선공산당을 비롯한 좌익은 해가 바뀌면서 돌연 찬탁(오른쪽)으로 입장을 바꿨다. 이후 해방정국엔 심각한 균열이 생겼고, 그것은 결국 민족의 비극을 불렀다.-동아일보 자료사진
반탁 vs 찬탁
1945년 12월 28일 한반도 신탁통치안이 포함된 모스크바 3국 외무장관회의 결정이 발표되자 반탁운동(왼쪽)이 거족적으로 확산됐다. 자연발생적인 반탁운동 초기엔 좌익도 동참했다. 그러나 소련의 지령을 받은 조선공산당을 비롯한 좌익은 해가 바뀌면서 돌연 찬탁(오른쪽)으로 입장을 바꿨다. 이후 해방정국엔 심각한 균열이 생겼고, 그것은 결국 민족의 비극을 불렀다.-동아일보 자료사진
《모스크바 3국 외무장관회의(삼상회의) 결정이 발표되기 전날인 1945년 12월 27일 외신기사 하나가 국내 언론에 보도됐다. 소련은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를 제의한 반면 미국은 즉시독립을 주장한다는 내용이었다. 나중에 사실과 다른 것으로 드러난 이 보도를 둘러싸고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일각에서 이 보도가 반탁운동을 격발시켜 남북분단의 한 원인이 된 것처럼 몰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3국 외무장관회의가 진행될 무렵 소련은 이미 한반도 신탁통치안에 흥미를 잃고 북한에 단독으로 공산정권을 수립하기 위한 기반을 닦고 있었다. 또한 반탁에 대한 민족적 공감대는 3국 외무장관회의 두 달 전부터 형성되고 있었던 만큼 3국 외무장관회의 결정이 발표된 뒤 거족적인 반탁운동은 자연발생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은 김구가 이끈 임시정부였다.》

● 반탁운동의 시작은 1945년 10월

미국의 한반도 신탁통치 구상을 최초로 국내에 전한 것은 1945년 10월 23일 매일신보였다. 미 국무부 극동국장 빈센트의 말을 인용한 것이었다. 이후 각계의 반탁 담화와 성명이 이어졌다. 좌우익이 없었다. 인공 중앙인민위원회도 10월 25일 담화를 내고 ‘전 민족의 생명을 부인당하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신탁통치를) 절대 배격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10월 26일 신탁통치 절대 반대를 결의한 ‘각정당행동통일위원회’에 조선공산당도 참가했다. 3명의 실행위원에 조선공산당의 김형선이 지명되기도 했다.

민족적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10월 30일 미 군정장관 아널드가 나섰다. 그는 기자회견에서 “빈센트의 말은 개인의 의사일 뿐 미국 정부의 방침은 아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뒤에도 건국동맹 성명과 조선독립촉성중앙협의회 결의문 등 반탁의 목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합동통신이 배포한 외신기사를 전재한 동아일보, 조선일보, 서울신문의 1945년 12월 27일자 기사.

● 1945년 12월 27일자 보도의 진상

12월 26일 이승만은 방송을 통해 “최후의 1인까지 죽음으로 싸워 독립 방해를 각성케 하자”고 촉구하는 반탁연설을 했다. 그가 모두에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 번스 국무장관, 연합군사령관 맥아더 대장, 하지 중장 등은 다 조선독립을 찬동하고 있다”고 말한 대목이 관심을 끈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소련은 신탁통치를 제의한 반면 미국은 즉시독립을 주장한다는 내용의 워싱턴발 AP통신 기사(12월 25일 발신)를 서울의 합동통신이 12월 27일 국내 언론에 배포했다.

당일 동아일보는 이를 1면 머리에 4단으로 받았다. 조선일보도 1면 머리에 ‘신탁통치설을 배격함’이라는 사설을 싣고 바로 옆에 그 기사를 4단으로 전재했다. 좌익의 영향을 받던 서울신문도 1면 상단에 2단으로 그것을 보도했다. 따라서 반탁운동을 유도하기 위해 우익언론이 문제의 외신을 보도했다고 하는 일각의 주장은 억지라고 하겠다.

● 일부 학자의 중대한 오류와 비약

조선일보 사사(社史)가 전하는 당시 상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12월 25일 모스크바에서 소련 외무장관이 조선신탁통치안을 제출했다는 뉴스가 워싱턴발 외신으로 날아들었다. 미국 측은 즉시 국민투표를 실시해 한국을 독립시키자고 주장했으나, 소련은 38도선에 의한 분할이 계속되는 한 국민투표는 불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는 실로 청천벽력이 아닐 수 없었다.’

이상으로 미뤄 볼 때 자료가 남아 있진 않지만 상당수 언론이 문제의 외신을 취급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기사를 동아일보가 최초로 보도했다고 하는 일부 학자의 주장은 중대한 오류다. 더욱이 이 같은 그릇된 전제 위에서 동아일보 보도가 반탁운동 격화의 도화선이 됐다고 몰아가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다.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언론학)에 따르면 당시 언론계는 좌익이 기선을 장악하고 있었다.

● 반탁운동은 자연발생적이었다

12월 27일 낮에도 전국의 초등학교 교사 400여 명이 서울 수송초등학교에 모여 반탁을 결의했다. 이처럼 자발적인 반탁운동이 더욱 가열되고 조직화된 것은 3국 외무장관회의 결정이 공식 발표되고, 그 사실이 라디오방송을 통해 알려진 12월 28일부터였다. 임정은 즉각 김구 주석의 집무실이자 숙소인 경교장에서 긴급 국무회의를 열고 미영소와 중국 등 4개국 원수에게 보내는 반탁 결의문을 채택했다.

그날 오후 서울 기독청년회관에선 대한독립촉성전국청년연맹 주최로 42개 단체 대표자가 모여 반탁대회를 가졌다. 조선혁명당, 신한민족당, 경북인민위원회, 보성전문학생회 등의 반탁 결의와 성명이 잇따랐다. 거리 곳곳에서 반탁 가두연설회가 열렸다. 그날 밤 서울시내 곳곳엔 반탁 전단이 살포되고 포스터가 붙었다.

● 경교장 모임엔 좌익도 참석했다

“12월 31일 서울운동장에서 반탁궐기대회가 열렸을 때 서울 시내 상점은 거의 문을 닫고, 동대문 뒷산이 하얗게 덮일 정도로 사람들이 몰렸어요. 반탁운동은 누가 계획하고 주도해서 일어난 게 결코 아닙니다. 좌도 없고 우도 없고 완전히 자연발생적이었습니다.” 경교장 모임에도 참석했던 강원용 목사는 올해 초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12월 29일 경교장에서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가 결성됐다. 각계 인사로 구성된 중앙위원 76명 중엔 박헌영 홍남표 이극로 김세용 같은 좌익 지도자들도 다수 포함됐다. 그와 동시에 좌익단체와 좌익인사들의 반탁 담화와 성명이 줄을 이었다. 12월 30일엔 40여 개의 좌익단체가 모여 ‘반파쇼공동투쟁위원회’ 결성대회를 갖고 신탁통치안철폐요구성명서를 채택했다.

● 찬탁을 반동으로 몰던 그들인데…

이 성명서에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반동분자들이 갈망하는 신탁통치는 결코 실현되고야 말았다’는 것이다. 그 시점엔 좌익에게 있어서도 신탁통치에 찬성하는 사람은 ‘반동분자’임이 분명했다. 조선공산당 서울시위원회는 12월 31일까지도 반탁 전단을 살포했다. 이쯤에서 확실히 가릴 것이 있다. 그것은 신탁통치를 제의한 쪽이 소련이었다고 해서 신탁통치에 대한 반대가 더 커졌다고 해석하는 논리는 정확하지 않다는 점이다.

좌익도 초기엔 신탁통치 자체를 반대했지 그것을 어느 쪽이 제의했느냐는 중시하지 않았다. 그러던 좌익의 태도가 해를 넘기면서 돌변했다. 1946년 1월 3일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가 돌연 3국 외무장관회의 결정에 대한 지지담화문을 발표했다. 1월 4일 인공 중앙인민위원회도 뒤를 따랐다. 이어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박헌영은 1월 5일 기자회견에서 “김구 씨의 반탁데모는 큰 과오를 범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 박헌영의 평양행과 소련의 지령

좌익의 노선전환은 대중의 호응을 얻지 못했다. 그런데도 왜 좌익이 갑자기 입장을 바꿨을까. 소련 지령설이 가장 설득력이 있다. 우선 소련 정부가 모스크바로 급히 불러들인 북한 주둔 소련군 민정책임자 로마넨코가 1945년 12월 30일 평양에 돌아와 이튿날 조선공산당 북부조선분국 집행위원들을 소집해 3국 외무장관회의 결정을 받아들여 분국이 해야 할 일을 지시했다. 그리고 그 시점에 박헌영이 몰래 평양을 다녀갔다는 믿을 만한 증언이 있다.

좌익의 이해할 수 없는 태도 표변 이후 좌우 대립은 수습불능의 상태로 치닫는다. 그와 함께 남북분단이 돌이킬 수 없는 현실로 굳어지면서 동족상잔의 비극을 예고한다. 소련의 배후조종에 따른 좌익의 방향 급선회와 그로 인한 해방공간의 혼란을 간과한 채 좌우대립 격화를 일부 언론보도 탓으로 돌리려는 일각의 시도는 당파성에 치우친 부당한 역사왜곡이라고 할 수 있다.

반탁운동과 좌우대립
1945년 10월 23일매일신보 보도미 국무부 극동국장 빈센트 “한반도 신탁통치” 발언
10월 25일인공 중앙인민위원회 담화‘전 민족의 생명을 부인당하는 일이 있더라도 (신탁통치) 절대 배격’
10월 26일 ‘각정당행동통일위원회’ 구성신탁통치 절대 반대 결의, 조선공산당도 참여
10월 30일 미 군정장관 아널드“빈센트 말은 미 정부 방침 아니다”
12월 26일 이승만 방송연설“미 트루먼 대통령도 조선독립 찬동”
12월 27일전국 초등학교 교사 400여 명서울 수송초등학교에서 반탁 결의
동아일보 조선일보 서울신문 등의 보도 ‘소련 신탁통치 제의, 미국 즉시독립 주장’(워싱턴발 AP통신 기사를 합동통신이 배포)
12월 28일 임시정부 긴급국무회의(경교장)미영중소 원수에게 보내는 반탁결의문 채택, 각계각층의 반탁 결의와 성명 잇따라
12월 29일‘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 결성(경교장)중앙위원 76명 중에 박헌영 홍남표 등 좌익지도자도 다수 포함됨
12월 30일 40여 좌익단체, ‘반파쇼공동투쟁위원회’ 결성대회신탁통치안 철폐요구 성명서 채택
로마넨코, 조선공산당 북부조선분국 집행위원회 소집“3국 외무장관회의 결정 받아들이라” 지시
12월 말∼1946년1월 초 박헌영, 평양 극비 방문남한 내 좌익입장 표변
1월 3∼4일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인공 중앙인민위원회3국 외무장관회의 결정 지지 표명
1월 5일박헌영 기자회견“반탁데모는 과오 범하고 있다” 비난

특별취재팀 전화 : 02-2020-0235, e메일:81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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