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25년 조선공산당 창당

  • 입력 2004년 4월 16일 18시 5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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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 가장 애창하는 가요이자 일제강점기 ‘민족의 노래’로 불렸던 ‘눈물 젖은 두만강’. 그 노랫말의 주인공이 바로 박헌영(朴憲永)이라니!

이정(而丁) 박헌영, 그가 누군가.

남과 북에서 똑같이 버림받은, 남과 북의 현대사에서 아예 ‘지워진’ 존재가 아닌가. 생몰(生沒)연대조차 가물가물했던 비운의 혁명가. 그는 남쪽에서는 도저히 상종 못할 ‘극렬 빨갱이’였고, 북쪽에서는 반동 쿠데타를 기도한 ‘미제의 앞잡이’였다.

그러나 그는 일제하 항일(抗日)의 상징이었다. 조선 공산주의운동의 대부(代父)였다.

당시 공산주의운동은 ‘민족주의 저항’의 중심축이었다. 지식인들에게 사회주의는 항일운동의 귀중한 자원이었고 “당대(當代)의 당당한 선택이었다.”

1925년 4월 17일 조선공산당이 창당된다.

산하 고려공산청년회의 책임비서 박헌영이 공산주의운동가였던 아내 주세죽과 함께 일경(日警)에 붙잡힌 게 그해 11월. 이태 뒤 열린 조선공산당사건 재판은 국내외 언론의 비상한 관심을 모은다.

김병로 이인 허헌 등 ‘항일변호사’들이 무료변론을 자청했다. 거개의 법률가들은 일제하에서 특권층의 부와 명예에 탐닉하고 있었으되.

고문으로 반신불수가 된 그는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박헌영의 몰골을 본 ‘상록수’의 심훈은 탄식했다. “눈을 뜬 채 등골이 뽑히고 산송장이 되어 옥문을 나섰으니, 그의 아내가 안은 것은 남편의 잔해(殘骸)였다.”

마침내 박헌영은 만삭의 아내를 데리고 두만강을 건너 블라디보스토크로 탈출을 감행하니 그 이듬해 8월이었다.

그의 탈출 소식은 조선 민중들에게 빅뉴스였다. 모두가 그의 안위(安危)를 걱정했다. 영화촬영차 두만강 변에 와있던 김용환(가수 김정구의 형)이 ‘눈물 젖은 두만강’의 가사를 지은 게 그 즈음이다.

‘두만강 푸른 물에… 그리운 내 님이여…’의 ‘내 님’은 다름아닌 박헌영이었던 것이다.

성균관대 임경석 교수(사학)는 모스크바 문서보관서의 자료와 가족들의 증언을 통해 오랫동안 묻혀 있던 사실들을 발굴해 냈다.

박헌영은 비로소 기일(忌日)을 찾았다. 1956년 7월 19일, 그는 김일성의 지시로 산중에서 처형됐다.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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