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영원한 혁명가…1912년 쑨원 대총통 취임

  • 입력 2003년 12월 31일 17시 1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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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광저우에서 거병(擧兵)을 도모했다 실패로 돌아가자 일본 도쿄로 피신했던 쑨원(孫文). 그는 호텔의 숙박부에 자신의 본명 대신 중산차오(中山樵)라고 적었다.

일행이 그 이름의 뜻을 묻자 이렇게 답했다. “중산(中山)은 중국의 산, 차오(樵)는 나무꾼을 뜻한다네. 조국에 새 세상이 온다면 나무꾼으로 평생을 산다 한들 무슨 여한이 있겠나.” 이후 중산은 그의 호가 되었다.

‘중국 혁명의 아버지’ 쑨원.

그는 실패한 혁명가였다.

1894년 청(淸) 왕조 타도를 위해 흥중회를 결성한 것을 시작으로 1912년 중화민국이 발족한 이후에도 그의 일생은 봉기(蜂起)와 실패, 그리고 망명으로 점철됐다. 1925년 베이징에서 객사한 쑨원이 남긴 유언은 이랬다. “혁명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는 영원한 혁명가였다.

1911년의 신해혁명으로 중화민국 대총통에 취임한 쑨원. 그는 내분과 수구세력의 저항으로 혁명의 성공이 위협받자 위안스카이(袁世凱)에게 기꺼이 그 자리를 내주었다.

그리고 위안스카이가 제정(帝政) 복귀 쿠데타를 일으키자 2차혁명으로 이에 맞섰다.

쑨원의 삼민주의(三民主義)는 중국 근대의 문(門)을 열었다.

1905년 공표된 민권(民權), 민족(民族), 민생(民生)의 삼민주의는 그가 ‘흩어진 모래(散沙)’로 표현했던 중국 민중을 구국주의의 이념 아래 결집시켰다.

쑨원이 세상을 떠난 뒤 못다 이룬 그의 혁명과업을 이어간 사람은 부인 쑹칭링(宋慶齡)이었다.

‘쑹(宋)씨 3자매’의 둘째였던 그녀는 장제스(蔣介石)와 결혼한 셋째 쑹메이링(宋美齡)과 함께 20세기 ‘2개의 중국’을 빛낸 여걸(女傑)이었다.

쑨원이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시기에 결혼해 ‘혁명의 동지’로서 10년을 함께했고, 그가 떠난 뒤 60년 가까운 세월을 중국의 혁명과 현대화에 진력했다.

그녀는 우아함과 온화함, 원칙과 용기, 여성적인 아름다움과 국제적 교양으로 이름을 떨쳤으나 마지막 순간까지 중국의 혁명적 애국주의자로 남았다.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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