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익칼럼]右往左往에서 易地思之로

  • 입력 2003년 12월 31일 17시 1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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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지사지(易地思之).’ 지난 한해 우리나라 모습을 ‘우왕좌왕(右往左往)’ 한마디로 요약했다는 기사를 보고 새해 우리가 취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그 대구(對句)를 생각하다가 찾아낸 것이 ‘처지를 바꾸어 생각하기’다. 그것은 자리를 옮긴다는 점에서는 우왕좌왕과 비슷하지만,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며 갈팡질팡하는’ 희화적인 모습과는 반대로 자신의 주장은 지키면서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는 바람직한 태도를 보여준다. 내가 이 사자성어를 떠올린 것은 오늘의 우리 정황을 좀 긴 눈으로 바라보면서였다.

▼이익사회 진입 갈등상황 늘어나 ▼

정치·사회적으로 우리나라의 전통은 권위주의적이고 폐쇄적이었다. 유신체제와 신군부 권력이 그런 분위기 속에서 가능했고 이 억압적인 정권들이 그런 전통을 더욱 강화했지만 경제가 성장하고 문화가 발전하면서 형성된 시민사회는 이와 달리 개방성과 다양성을 추구했다. 80년대 후반 이후 이 상반된 흐름이 충돌하기도 하고 양보하기도 하면서 정치권력은 배타적 독점성을 풀기 시작했고 사회적 권력은 분화됐다. 김영삼 정부와 김대중 정부 아래서 우리나라가 상당한 민주주의를 성취하고 집단과 개인의 주장들이 강하게 표현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변화를 통해서였다.

노무현 정권은 ‘참여 정부’를 표방함으로써 이 변화를 더욱 적극화하고 있다. 새 집권자가 어떤 의도로 이 모토를 채택했든, 여기에는 우리 사회가 이익사회로 진입했다는 것, 개인과 집단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서슴없이 추구하게 되었다는 것, 그 다양한 권리와 주장이 국정 운영에 동참하기를 요청한다는 점 등이 함의되어 있을 것이다. 그것은 명분론이 강조되던 유신 시절, 실천론으로 역설되던 운동권 시절 등의 정치적 이념적 억압으로부터 권력의 미분화가 몰고 온 이익 추구의 게젤샤프트적 개방성으로의 이행으로 내게는 이해된다.

그 개방성은 80년대 후반 이후 한꺼번에 폭발된 노동자와 대학생들, 직능단체들의 항의와 요구로 표면화됐고 90년대를 가로지르며 그것들의 내면화와 사유화를 거쳐 근년에는 마침내 집단 이익의 주창과 추구로 공론화됐다. 그러니까 나(와 우리)의 이익은 추구되고 보호돼야 하며 훼손되고 억압돼선 안 된다는 의식이 팽배해진 것이다. 그러나 이익사회의 아이러니는 한쪽의 이익이 대체로 다른 쪽의 손실(적어도 기대 수입의 상실)을 전제한다는 제로섬게임의 상쟁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노무현 정권은 참여를 유도한 것은 좋았지만 그 다양한 이익집단들의 상반된 주장과 권리를 조율 통합하는 데는 유력하지 못했다. 그의 ‘우왕좌왕’은 이래서 빚어진 것이다. 자기네 지역에 핵폐기물처리장 설치를 반대하는 님비 현상이나 여야간의 선거법 싸움처럼 현실적인 이해관계를 놓고 벌이는 갈등은 물론이고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 등 정책적 이념적 영역의 갈등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상반된 집단간의 상충하는 이해관계에서 대통령의 리더십을 무력하게 만들 만큼 이기주의는 강력했다. 그 이기주의는 나의 이익만 주장하고 너와 전체의 이해관계는 고려하지 않는, 벌거벗은 일방적 욕망이었다.

▼처지 바꿔 서로의 이익 생각해야 ▼

그래서 나는 처지를 바꾸어 서로의 이익을 생각해야 한다는 ‘역지사지’의 사유법에 이르렀던 것 같다. 상대의 입장을 고려할 때에야 “동의하지는 않지만 이해할 수 있다”며 넉넉한 품위를 지킬 수 있고 ‘사생결단’ 대신 ‘선택적 대안’으로, 투쟁 대신 토론으로, 폭력 대신 예의로 양보할 수 있을 것이며 그것이 우리의 정황을 상생의 구도로 발전시켜 성숙한 민주주의와 공동체적 삶의 덕성을 누리게 할 것이다. 이제 우리도 우왕좌왕의 혼란에서 ‘역지사지’의 수준으로 전환할 단계에 이르지 않았을까. 갑신년 새해의 내 화두가 그것이다.

김병익 문학평론가·인하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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