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허승호/'美쇠고기수입 재개' 안되는 이유

  • 입력 2003년 12월 31일 17시 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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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파이어 이코노미(흡혈귀 경제)’라는 말이 있다.

미국 월가가 한국 경제를 비판할 때 쓰는 말이다. 논리는 이렇다.

“한국에서는 사실은 죽었지만 억지로 숨만 붙여 놓은 ‘강시 기업’이 펄쩍펄쩍 돌아다닌다. 마땅히 퇴출돼야 할 불량기업이 살아 있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이렇게 되면 멀쩡한 기업까지 ‘혹 강시가 아닌가’ 의심받으며 불이익을 당한다. 경제 전체의 불확실성이 커진다. 한국 기업이기 때문에 주가나 신용평가 등에서 불이익을 받는 ‘코리아 디스카운트’도 이래서 생긴다.”

우리로서는 분통 터지는 일이지만 이런 지적이 있다는 것은 현실이다.

그런데 비슷한 일이 쇠고기 시장에서 벌어질 조짐이다. 이번에는 미국이 ‘한국에서 강시를 존속시키라’고 요구하는 형국. “미국산 쇠고기에 대한 수입금지 조치를 완화해 달라”는 미국의 요청이 바로 그것이다. 미국 쇠고기의 수입이 재개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한국에는 ‘광우병 우려 쇠고기’가 합법적으로 공공연하게 존재하게 된다. 이는 ‘언제 어디서 미국 쇠고기가 한우고기로 둔갑할지 모른다’는 불안으로 연결된다. 그 때문에 국내에서 유통되는 모든 쇠고기에 대한 불신으로 확산된다. 한우고기마저 배척된다. 쇠고기 시장 전체가 괴멸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국내 소 사육 농민과 정육점들이 생존 기반을 잃고 만다. 안전한 쇠고기를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소비자의 권리도 박탈당한다. 쇠고기가 식탁에서 물러나면서 식생활의 질이 떨어진다. 소비자 후생이 훼손되는 것이다.

불투명성 때문에 좋은 기업까지 불이익을 받는 원리와 똑같다.

미국의 어처구니없는 요청을 정부가 거절했다 한다. 그러나 그것으로 문제가 종결될 것 같지는 않다. 한국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량은 일본과 멕시코에 이어 세계 3위. 미국으로서는 쉬 포기할 수 없는 시장이다. 쇠고기에서도 ‘미국식 힘의 논리’를 동원해 보려 할 가능성이 크다.

한국 정부는 논리적, 도덕적 당당함을 우군으로 삼아 국민의 권리와 나라의 체면을 지켜야 한다.

허승호 경제부 차장 tige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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