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의 한반도정책]<1>그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

  • 입력 2003년 12월 31일 16시 3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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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W 부시 행정부의 등장은 역대 어느 미국 행정부의 출범보다 한반도에 직접적이고도 깊은 영향을 끼쳤다. 특히 2001년 9·11테러를 겪으면서 부시 행정부가 새로 구축한 ‘국가안보전략(NSS)’은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의 평화번영정책과 근본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북한이라는 위협의 실체를 바라보는 시각에서부터 달랐다. 하지만 아직도 워싱턴에서는 ‘노무현 정부가 부시 행정부를 너무 모른다’는 얘기가 들려온다. 동아일보는 워싱턴과 서울의 체감온도차를 직접 측정해보기 위해 지난해 12월 국제부 외교안보팀의 김정안(金正眼) 기자를 워싱턴에 급파했다. 김 기자는 12월 1일부터 10일까지 부시 행정부의 한반도정책을 조율하는 백악관과 국무부의 당국자들, 그리고 싱크탱크 관계자 15명을 집중 접촉했다. 특히 백악관과 국무부의 핵심당국자 3명은 한국 언론이 평소 접하기 힘든 인물들이었다. 그들의 생생한 현장 육성(肉聲)을 ‘무버 & 셰이커(Mover & Shaker)’라는 주제로 5회에 걸쳐 연재한다.》

“한반도를 둘러싼 위기(crisis)는 두 개다. 하나는 북한 핵이고 또 다른 하나는 바로 한미동맹의 심각한 현주소다.”

한미동맹의 새로운 반세기를 눈앞에 둔 2003년 12월, 동맹의 현주소에 대한 워싱턴의 시선은 한겨울 날씨만큼이나 차가웠다. 집중인터뷰에 응해준 미 행정부의 핵심 실무자들이나 워싱턴 싱크탱크의 한반도 전문가들은 진보 보수를 떠나 어떤 식으로든 현재 한미관계의 뒤엉킨 실타래를 풀어야 한다고 경고했다.

▼관련기사▼
- "한국 외교팀,美몰라도 한참 모른다"

▽“노무현 정부의 평화번영정책은 무책임한 평화지상주의다”=북한 핵문제 해결을 위한 6자회담에 깊숙이 관여해온 한 행정부 당국자의 말은 충격적이었다.

김정안기자

“노무현 대통령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at any cost) 한반도 평화를 정착시키겠다’는 식의 발언을 해왔다. 이는 북한이 침략을 해도 한반도 평화를 위해서라면 항복할 자세가 돼 있다는 해석도 가능한 것이 아니냐.”

이어 그는 “한미 양국은 외부로부터 위협이 있을 경우 서로 나서 함께 싸워줘야 하는 안보동맹을 맺고 있다”고 말하고 “한국의 지도자로서 오해의 소지가 있는 발언을 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며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그가 미 행정부 내에서 하드라이너(hardliner·강경파)로 꼽히는 인물이긴 하지만 행정부 인사들이 한국 정부의 대북관과 정책에 대해 이처럼 노골적으로 불만을 토로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하드라이너들의 논리는 삼단논법처럼 간단명료하다. 첫째,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은 실패한 정책이다. 둘째, 노무현 정부의 평화번영정책은 햇볕정책을 승계하고 있다. 셋째, 그러므로 노무현 정부의 평화번영정책은 실패한 정책을 답습하고 있는 무책임한 평화지상주의라는 것이다.

미국과 북한을 향한 한국 정부의 ‘이중적 접근(dualistic approach)’도 불신의 이유다. 한국 정부는 2002년 10월 북한이 우라늄 핵개발 프로그램을 공개적으로 시인한 이후에도 대북 원조를 늘리면서 미국과 북한을 동시에 달래려는 이중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딕 체니 부통령, 존 볼턴 국무부 군축담당 차관 등이 거쳐간 곳으로 ‘네오콘(Neocon·신보수주의)의 산실’로 불리는 미 기업연구소(AEI)의 니컬러스 에버스타트 선임연구원(한반도 담당)은 이렇게 말했다. “김대중 정권이 처음으로 추진했던 햇볕정책이 ‘비극’으로 끝났다면 이를 되풀이하는 노무현 정권의 대북정책은 ‘광대극(farce)’과 같다.”

한국 정부의 대북 인식에 대한 문제 제기는 햇볕정책을 지지해온 워싱턴의 중도온건파 인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데이비드 스타인버그 조지타운대 아시아센터 소장은 “내가 만난 한국 정부 관계자들은 하나같이 ‘북한은 절대 위협이 될 수 없으며 우리를 공격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말했는데 정말 순진한(naive) 접근”이라고 지적했다.

▽노무현 정부의 대미 외교는 탈레반식 외교?=그러나 노무현 정부와 부시 행정부의 이런 시각차를 좁히기에는 한국 외교안보팀의 외교적 역량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게 워싱턴 인사들의 종합평가였다.

지난해 워싱턴에서는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이종석(李鍾奭) 사무차장을 정점으로 한 청와대 내 젊은 보좌진을 가리켜 ‘탈레반’이라는 별칭이 유행했다.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을 철권통치했던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을 뜻하지만, 자신들의 이상에만 빠져 폐쇄적이고 독단적인 청와대 일부 인사들을 비꼬는 단어가 됐다는 것이다.

헤리티지재단의 발비나 황 연구원은 “이 단어가 소수의 한반도 정책가들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미 의회, 백악관, 싱크탱크 관계자들 사이에서도 널리 사용됐을 만큼 한국 NSC ‘이종석팀’에 대한 인식은 악화돼 있다”고 전했다.

워싱턴의 한반도 관계자들은 서울을 방문할 때마다 이 차장을 만나 그의 생각을 들어보려 했지만 이 차장이 ‘의도적으로 피하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고 불만을 털어놨다.

조지타운대 빅터 차 교수는 “감정이 섞인 ‘탈레반’이라는 단어도 바람직하지 않지만 안보동맹을 맺고 있는 미국을 배척한다는 인상을 주는 것 역시 위기를 맞고 있는 한미관계에 도움이 안 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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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이너서클이 정보 독점"▼

▽“외교부가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청와대의 젊은 보좌진이 폐쇄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면 외교통상부는 이런 ‘탈레반’들에 밀려 제구실을 못하고 있다고 워싱턴 인사들은 우려했다.

황 연구원은 “윤영관(尹永寬) 외교부 장관이나 한승주(韓昇洲) 주미 대사가 청와대의 ‘이너 서클(inner circle)’에 밀려 힘이 없다는 소문이 파다하다”며 “이들이 미국에 설명한 한국의 입장과 나중에 한국 정부가 공식 발표하는 내용이 차이가 날 때마다 이런 추측은 확신으로 굳어지곤 했다”고 밝혔다. 황 연구원은 다시 ‘이너 서클’ 멤버들을 지칭하며 “그들은 대통령에게 모든 정보를 보고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외교부는 이들에 의해 따돌림을 당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라크 파병의 경우가 그 예. 미 행정부는 주한 미 대사관이나 외교채널을 통해 북핵 문제 해결과 이라크 파병이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는 점을 주지시켰는데도 노 대통령은 두 가지 쟁점을 연결시키는 발언을 해 왔다는 것.

미 행정부의 한 당국자는 “한국 외교부 관리들 역시 청와대 인사들을 가리켜 ‘탈레반’이라고 말하는 걸로 안다”며 “한국 외교안보팀 내 마찰과 분열도 문제”라고 평가했다.

▽야당의 정략주의도 문제다=워싱턴의 무버 & 셰이커들은 또 주한미군 감축 및 미 2사단의 한강이남 이전 배치, 그리고 전시작전권 반환 문제를 거론하며 야당, 특히 한나라당의 정략주의를 경계했다.

이미 10여년 전부터 논의돼온 이 문제를 마치 한국의 반미감정에 대한 미국의 감정적 대응으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야당이 이 같은 주장을 은근히 부추기고 있다는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행정부 당국자는 “한나라당의 일부 인사들은 한미동맹의 균열이 마치 진보정부가 들어섬으로써 야기된 현상이라는 논리를 내세워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한다”며 “한미동맹이 현재 위기를 맞고 있지만 주한미군 재편과 이를 연관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고 밝혔다.

스타인버그 교수도 외교정책에 있어 초당적 협력이 부족한 한국 정치의 현실을 비판했다. 그는 “외교정책은 초당적인 협력이 중요하지만 아직 한국의 정치현실은 그렇지 못한 것 같다”며 “(외교정책 기조에 있어서도) 여야가 나뉘어 자신들의 이득만을 챙기려 하는 듯한 인상을 자주 받았다”고 말했다.

김정안 기자 cred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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