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문예]단편소설 당선작 '독'/ 당선소감-심사평

  • 입력 2003년 12월 31일 16시 1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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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혜란△1970년 전북 전주 출생 △1994년 전주대 국어교육과 졸업 △2004년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업예정
허혜란
△1970년 전북 전주 출생 △1994년 전주대 국어교육과 졸업 △2004년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업예정
▼당선소감-허혜란▼

오랜만에 고향에 내려갔다. 명절에도 한자리에 모이기 힘든 많은 가족들이 좁은 방안에 모였다. 크리스마스를 이틀 앞두었던 차라 어린 조카들에게 두둑한 선물 보따리를 풀고 푸짐한 외식을 하러 집을 나섰다. 공교롭게도 메뉴는 아귀찜이었다. 하필이면 왜 그 많은 식당 중에서 내 어머니는 그곳의 문을 열고 들어가시는지. 당선소식을 듣는 내게 스무 개가 넘는 눈망울이 쏟아졌다. 축구공 하나가 공중을 휘몰아치며 골대를 통과하느냐 마느냐를 바라보는 바로 그 눈빛이었다. 그들의 눈에 깃든 소망과 염원의 빛이 앞으로 글을 쓰는 동안 오래오래 기억될 것이다.

급히 서울로 다시 오는 길, 새로 뚫린 천안∼논산간 민자고속도로에 안개가 가득했다. 가시거리가 30m 정도 될까. 보이는 거라고는 모락모락 감도는 뿌연 안개뿐이었다. 한 시간이 넘도록 핸들을 잡고 고개를 바싹 들이대며 운하를 헤치며 나아갔다. 백미러 속에는 흐릿한 불빛을 깜박이면서 뒤따르는 몇 대의 차가 보였다. 덜컥 겁이 났다. 나는 그 순간 간절히 원했다. 저런 불빛 하나 내 앞에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러면 저 불빛만 보면서 안전거리를 유지하며 뒤따를 텐데. 당장이라도 갓길에 멈춰 서서 뒤따르는 차들이 지나갈 때까지 기다려 맨 꼴찌로 따라붙고만 싶었다. 동시에 내 속에는 또 다른 욕망이 안개처럼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막막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저 길을 향해 액셀러레이터를 꾸욱 누르고 싶은 것이다. 나도 모르게 오른발에 힘이 실렸다. 붉은 바늘이 아무 내색 없이 110, 120을 넘어서고 있었다. 당선소감을 들고 신문사로 향하는 길 위에서 나는 그렇게 두 욕망의 틈바구니에 보잘것없이 서 있었다.

다만 열심히 하겠노라는 진부한 말밖에 나는 할 수 없다. 작품을 선택해주신 동아일보사와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소설이 무언가를 고민하게 하고 내 앞의 세상이 어떻게 보여지는지 노려보게 하신 교수님들에게 감사 말씀을 전한다. 오랫동안 기다려주고 믿어준 가족들에게 기쁨을 돌린다.

▼심사평▼

단편소설 부문 본심 중인 김화영(왼쪽) 박완서씨.

엄청난 수의 응모작 중 예심을 통과한 10편, 그 가운데서 일정한 수준에 도달하여 정독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는 작품은 불과 4편 정도였다.

‘버그’는 군더더기 없는 문장으로 사이보그 인간의 소외라는 첨단 기술시대의 주제를 무리 없이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 주제의 처리 방식은 주제가 첨단적인 만큼 이보다 더 독창적이어야 할 것 같다. ‘의자와 망원경’은 떠돌이와 붙박이, 꿈꾸는 자와 현실주의자 사이의 대위법을 다룬 균형 잡힌 작품이다. 그러나 창조의 세계에 있어서 모범생의 균형은 장점인 동시에 약점이다. ‘사막을 나는 하늘소’는 마지막까지 당선 후보로 남았다. 여러 면에서 탁월한 문학적 자질이 엿보인다. 그러나 신인의 작품치고는 너무 멋을 부린 듯한 비약과 잡다한 소제목들로 나뉘어진 단편들의 모자이크 형식이 신인의 작가적 장래에 대한 신뢰에 부담이 되었다. 그러나 실망하지 말고 차분히 노력하면 반드시 역량을 인정받을 기회가 있을 것으로 믿는다.

‘독’은 독, 피, 칼 같은 단음절 속에 고도로 압축된 폭발력을 서술의 행간에 적절하게 충전시켜 전 작품을 팽팽하게 긴장된 상상력의 자장으로 끌어올리는데 성공하고 있다. 처음으로 아귀를 등장시키는 도입부, 열쇠를 삼키는 열쇠 구멍, 실패로 끝나는 남편과의 정사, 세계로 통하는 저 인색한 통로인 창문과 자기 소외, 옆방 총각의 무의미하게 저 혼자 발딱 선 남성…. 이 주목할 만한 순간들에 고압의 전력을 실어주는 독은 곧 생명력과 표리를 이루는 힘이다. 이 힘은 곧장 이 작품의 힘이 된다. 작가의 대성을 빈다. 다만 새해 벽두부터 이처럼 음울하고 날카로운 풍경을 선보이는 것에 대하여 독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자 한다.

박완서 소설가

김화영 문학평론가·고려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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