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김순덕/지진의 정치학

  • 입력 2003년 12월 30일 18시 2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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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리히터 규모 6.5의 강진이 미국 캘리포니아주 중부 해안을 덮쳤다. 주민 3명 중 1명꼴인 3만여명의 목숨을 앗아간 이란 밤시의 지진과 비슷한 규모였다. 하지만 일부 지역의 정전과 약간의 건물 파손을 제외하고는 큰 피해가 없었다. 사망자는 3명에 ‘불과’했다. 병원과 구호센터부터 무너져 내려 도시 전체가 공동묘지처럼 변한 밤시와는 하늘과 땅 차이다. 왜 이런 차이가 빚어졌을까.

▷선진국과 후진국의 차이라고 답하면 간단하긴 하다. 하지만 이란도 나름대로의 내진(耐震) 건축법규를 갖춘 나라다. 차이가 있다면 재해에 철통같이 대비하는 정직하고 유능한 정부를 갖고 있느냐 아니냐일 뿐. 건축허가를 내주는 이란의 공무원들은 어느 순간, 자기 아이들 머리 위로 건물이 무너져 내릴 수도 있음을 무시해 왔던 것이다. 주택은 부족하고 기술수준은 낮아 건축법을 지키기 힘들다지만 세상에 핑계 없는 무덤은 없다. 최근 국제사회의 핵사찰 요구를 수용하기 전까지 이란은 대량살상무기에 매달리느라 민생을 돌볼 여유가 없었는지 모른다.

▷지진은 땅을 뒤흔드는 데 그치지 않는다. 정치권의 지각변동까지 몰고 오는 게 지진이다. 아무리 천재지변이라 해도 어떻게 대비하고 대처하는지는 정부가 할 일이기 때문이다. 1979년 이란혁명으로 국왕이 축출된 데도 지진이 작용했다. 몇 차례 지진으로 나라가 도탄에 빠졌을 때 고고한 국왕과 정부는 소 잃고도 외양간을 안 고쳐 민심을 잃었다.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쪽은 지금 이란 정부를 구성하고 있는 이슬람 종교집단이었다. 니카라과의 독재자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정권을 축출한 원동력은 72년의 지진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88년 알제리, 92년 이집트의 지진도 이슬람 세력을 확장시키는 데 큰 몫을 했다.

▷역사는 되풀이되는가. 이제는 집권 25년째인 이란의 권위주의적 이슬람 정권이 화살을 맞고 있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의 지원팀이 달려오기 전까지 이란 정부는 구호견 몇 마리 푸는 데 그쳤을 만큼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였다. 무능하고 무책임한 정부에 대한 거센 비판이 일기 시작하면서 이란에 또 한번의 지각변동이 닥치지 않을까 세계가 지켜보는 상태다. 79년 외교관계를 단절한 ‘미 제국주의자’들이 지진 이후 ‘악의 축’ 이란에 인도적 지원을 펼치며 화해 조짐을 보이는 것이 불행 중 다행이랄까. 이슬람이든 미국이든 도탄에 빠진 국민이 원하는 것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눈물을 닦아 주는 구체적 해결책이라는 것을 이란의 지진이 일깨워 주고 있다.

김 순 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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