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출신 청와대 경제首長 잇단 단명…현실경제 벽은 높았다

  • 입력 2003년 12월 29일 17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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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정부 경제정책의 핵심 실세로 꼽히던 이정우(李廷雨) 대통령정책실장의 ‘2선 퇴진’을 계기로 역대 정부의 첫 경제정책 책임자들이 꿈꾼 ‘장밋빛 이상(理想)’과 ‘냉엄한 현실’이 다시 주목을 끌고 있다. 특히 김영삼(金泳三) 정부 이후 청와대에서 대통령을 보좌한 학자출신의 첫 경제정책 수장(首長)은 모두 ‘개혁’을 기치로 내걸었으나 뚜렷한 실적을 남기지 못한 채 정통 경제관료 출신들에게 자리를 내줬다. 이에 따라 취임 초기 대통령의 의욕 과잉과 인사시스템의 부재(不在)가 반복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반복되는 역사=김영삼 전 대통령은 1993년 2월 첫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으로 박재윤(朴在潤) 당시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를 임명했다. 박 전 수석은 ‘YS의 경제 가정교사’로 통하던 인물로 김 전 대통령의 후보 시절부터 선거캠프에 참여했다.

그가 수석직에 오르자마자 내건 구호는 ‘신(新)경제 100일 계획’. 주요 내용은 △공무원 봉급 동결 △공산품 가격 동결 △예산 삭감액을 재원(財源)으로 한 제조업 지원 등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동결’은 사실상 5공화국이 강압적으로 시행했던 물가안정대책처럼 시장논리와는 거리가 멀다는 비판을 받았다. 또 경제관료 조직과도 심각한 마찰을 빚었다. YS 정부 초기 경제분야를 좌지우지했다는 평을 들은 박 전 수석의 독주는 94년 경제부총리를 꿈꾸던 그가 통상산업부 장관으로 옮겨가고 ‘세계화’가 새로운 화두로 떠오르면서 사실상 막을 내린다. 박 전 수석의 빈자리는 경제기획원에서 잔뼈가 굵은 정통 경제관료 출신인 한이헌(韓利憲)씨가 맡았다.

김대중(金大中) 정부에서도 학자 출신인 김태동(金泰東) 성균관대 교수가 첫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에 올랐다. 김 교수는 이른바 ‘DJ노믹스의 산실(産室)’이나 다름없는 ‘중경회(中經會)’의 리더격으로 성장보다는 분배를 중시했다.

그는 역시 교수 출신인 윤원배(尹源培) 금융감독위원회 부위원장과 이진순(李鎭淳)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 등 중경회 멤버들과 함께 경제분야 요직을 장악한 뒤 ‘경제개혁’을 주장했다.

하지만 대기업과 고위 경제관료에 대한 강도 높은 공격 등 설화(舌禍)와 관료조직과의 마찰 등이 겹치면서 3개월 만에 대통령정책기획수석비서관으로 밀려났다. 나머지 중경회 멤버들도 이런저런 이유로 99년 이후 자리를 내놓았다.

이정우 전 대통령정책실장도 학자 출신이다. 경제부처 공무원들은 박재윤씨나 김태동씨와 비교할 때 ‘독선과 독단’의 모습은 덜 보였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뚜렷한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고 현실감각이 떨어졌으며 부처간 정책조율이 미흡했다는 비판 끝에 결국 ‘대통령의 최측근 경제참모’에서 물러났다.

▽높은 이상, 냉엄한 현실=경제전문가들은 냉엄한 현실을 직시하지 않은 이들의 ‘고결한 이상’이 역설적으로 한국 경제의 답보 내지는 후퇴를 가져왔다고 지적했다.

박재윤씨는 ‘95년 이후 경상수지 흑자와 3% 물가안정’을 공언했지만 경상수지 적자누적과 물가불안만 초래했다. 여기에 경제구조 개혁마저 실종돼 결과적으로 외환위기의 직간접적인 원인이 됐다는 분석도 있다.

김태동씨와 이정우씨가 무게중심을 둔 ‘분배론’도 일단 경제의 파이를 키우는 것이 급선무인 우리 실정에서는 득보다는 실이 많았다는 것이 일반적 분석이다.

한국경제연구원 좌승희(左承喜) 원장은 “이들은 냉혹한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낭만적 이상주의자들이었다”고 평가했다.

삼성경제연구소 장상수(張相秀) 상무는 “1960년대라면 모를까 경제구조가 고도화하고 복잡해진 상황에서 교과서가 제시한 이상을 현실에 그대로 적용하려고 한 것은 무리”라고 말했다.

고기정기자 ko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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