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571년 천문학자 케플러 출생

  • 입력 2003년 12월 26일 18시 3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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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체역학(力學)의 창시자 케플러.

행성(行星)의 운행 원리를 밝힌 ‘케플러의 법칙’은 태양계에 물리학의 옷을 입힌 위대한 업적으로 꼽힌다. 근대 천문학의 길잡이가 된 그의 천체이론은 50년 뒤 뉴턴이 바통을 이어받아 ‘뉴턴역학’으로 화려하게 피어난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는 위대한 업적이 반드시 위대한 생(生)의 소산만은 아님을 종종 보여준다.

천문학자로서 케플러의 자리는 밤하늘의 신성처럼 빛났으나 그의 발이 딛고 있는 지상에서의 삶은 참으로 질척였다.

케플러는 1571년 신성로마제국의 바일(독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용병(傭兵)이었고 어머니는 여관집 딸이었다. 아버지는 빚보증을 잘못 서 교수형을 선고받고 간신히 처형을 면했는가 하면, 어머니는 마녀사냥에 몰려 화형 선고를 받기까지 했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그는 평생을 경제적 빈곤에 찌들려야 했고 스스로를 ‘더러운 개’라고 자조했다.

그는 한때 점성술사(占星術師)로 이름을 떨치기도 했다. 1594년 그라츠대학에서 점성력의 편수를 맡았던 케플러는 그해 혹한(酷寒)과 전쟁을 예고하는 점괘로 신통력을 인정받았다.

그는 생계를 위해 일생 점성술을 ‘겸업’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에게 점성술은 “저 고귀하고 지혜로운 어머니 천문학에서 태어난 어리석고 행실 고약한 딸”일 뿐이었다.

별이 뜨는 밤에는 행복했으나 별이 지고 나면 불행했던 케플러.

그는 네 살 때 앓은 천연두로 걸음을 절름거렸고 아내와 아들을 천연두로 잃었다. 일설에는 부인이 정신이상이었다고 한다.

볼품없는 외모에 성격 또한 원만치 못해 항상 외톨이로 지내야 했다.

그는 1630년 노상에서 열병으로 사망했다. 밀린 봉급을 받으러 가던 길이었다.

그의 묘비에는 이런 자작시(自作詩)가 새겨졌다. ‘나는 천계(天界)를 재었으나 이제 지하세계의 그림자를 잰다/ 영혼은 하늘의 것이지만 육체의 그늘은 여기 누워 있노라.’

그러나 케플러는 사후에도 편히 잠들 수 없었다. 그의 묘는 ‘30년전쟁’의 와중에 파헤쳐졌다.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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