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삶]안철환/흙은 사람도 바꿉니다

  • 입력 2003년 12월 26일 18시 2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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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에 딱 한 번씩 만나는 귀농자가 있다. 매년 귀농운동본부의 송년회 때마다 보았으니 올해로 다섯 번은 만난 것 같다. 처음 인상은 참 날카롭고 어딘가 불안한 면도 있었는데, 이번 송년회에서 본 그 사람은 전혀 달랐다. 표정도 부드러워졌고 꽤나 모난 것으로 기억되던 말투도 바뀌어 영 딴사람이 돼 있었다. 혹시 내 기억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 싶어 곰곰 생각해 보니 그가 매년 조금씩 변해 왔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만난 귀농자들은 대체로 순수하지만 개성이 강한 게 특징이다. 그러나 뭔가 조화롭지 못한 듯한 모습은 조금만 생각하면 금방 이해할 수 있다. 도시의 기득권을 버리고 흙과 함께 살겠다는 생각을 먹을 만큼 순수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도시와는 타협하지 못하는 모난 성격을 가진 경우가 많은 것이다. 이 시대에 귀농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 않은가. 강한 개성이 양보할 줄 모르는 성격으로 나타나 간혹 치열한 의견 다툼이 있는 경우도 있다.

때로는 귀농에 실패하고 탈농하는 사람도 적지 않은데, 이런 모나고 고지식한 성격 탓도 무시할 수만은 없다. 도시와는 전혀 다른 이웃관계를 잘못 풀어내 적응을 못한다든가, 이론적으로 배운 농사의 응용에 실패한다든가 해서 결국 밑천도 떨어지고 아이들 교육 문제도 맞물려 다시 도시로 가는 경우들이다.

그런데 흙은 한번 맛보면 꼭 마약과 같이 그 향수를 잊을 수 없는 모양이다. 내가 아는 탈농자들 대부분이 다시 귀농을 꿈꾸며 심기일전을 준비하고 있으니 말이다.

경기 포천시에 가면 부모 없는 청소년들을 돌보며 농사를 짓는 목사님이 계시다. 서울 한복판에서 살다가 문제가 끊이지 않아 시골로 옮긴 것이다. 그곳 아이 중에 항상 고개를 푹 숙이고는 땅에다 침을 퉤퉤 뱉으며 사람을 봐도 전혀 인사할 줄 모르는 아이가 하나 있었다. 그런 아이가 시골로 가서는 아주 조금씩 고개를 들더니 몇 년이 지나 이젠 어깨도 펴고 인사도 넙죽넙죽 잘 하는 의젓한 학생이 되었다고 한다.

전남 진도군에 가면 평생 유기농을 해 온 농부 선생이 한 분 계시다. 한번은 그를 뵈러 가는 길에 빈손으로 들어가기도 뭐해서 아무 생각 없이 딸기를 사 들고 갔다.

“선생님, 그냥 오기도 그렇고 해서 샀는데 농약 친 걸 겁니다. 여러 번 씻으면 괜찮지 않겠습니까?”

“그냥 오시지…. 농약 친 거면 어떻습니까? 다 먹는 건데요. 옛날엔 가렸는데 지금은 그냥 먹어요. 일부러 먹지는 않지만.”

사모님은 옛날엔 손님만 오면 그렇게 신경이 쓰였단다. 담배꽁초 같은 반갑지 않은 쓰레기도 생기고, 손님들이 농장 곳곳에서 자라는 들풀들을 조심성 없이 밟고 다니곤 하니 영 마음이 불편했던 모양이다. 그 농장의 어느 풀도 사모님의 손길이 닿지 않은 것이 없다. 다만 공원처럼 울타리가 없고 사열하듯이 획일적으로 늘어서 있지도 않아 도시 사람들 눈엔 그냥 잡초처럼 보였을 뿐이다. 그런데 그조차도 요즘은 별로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니, 뭐랄까 집착을 넘어선 마음일 것이다.

아마도 흙의 마음이 이런 게 아닐까 싶다. 깨끗한 놈이나 농약에 찌든 놈이나 벌레에게 먹힌 놈이나 돌아온 탕자까지 다 받아들이는 너른 품….

나는 우리 밭에 농사 실습하러 오는 사람들에게 ‘참된 농부는 열매보다는 흙을 잘 살리는 사람’이라고 강조하곤 한다. 그러려면 농부는 추운 겨울을 잘 겪어야 한다. 농한기 전에 내년에 쓸 거름을 준비하고 망가진 밭을 보살피며 동안거에 들어간다. 농한기라 해서 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흙이 쉬는 것처럼 몸과 마음도 쉬면서 한 해를 반성하고 오는 해를 기다리는 것이다. 혹한에 움츠리며 추위를 이겨내는 과정을 거치면 흙은 더 성숙될 것이다. 농부도 추운 겨울을 겪고 나면 더욱 흙을 닮아갈 것이다.

▼약력 ▼

1962년생. 서강대 물리학과 중퇴. 소나무출판사 기획실장을 거쳐 지금은 사단법인 전국귀농운동본부에서 농사 및 생태관련 출판 일을 맡고 있다. 경기 안산시에서 밭 두 마지기를 갈면서 채소와 잡곡 농사를 짓고 있다.

안철환 전국귀농운동본부 출판기획실장·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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