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순덕칼럼]대통령에게 배운 것들

  • 동아일보
  • 입력 2003년 12월 26일 18시 19분


아무래도 혼인빙자간음죄는 없어져야 할 것 같다. 사생활 영역이라거나 세계적으로 이를 처벌하는 입법례가 드물어서가 아니다. 남자가 “사랑한다. 결혼하자”라는 말로 여자를 속여 성을 편취했다면 죄받아 마땅하다고 지난해 10월 합헌결정이 내려졌지만, 대통령이 바뀐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대통령도 하루가 멀게 말을 뒤집는 현실이다. 총선 출마예정자들 앞에서 “여러분에게 득이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분명히 말했는데 다음 날엔 단순한 사적 덕담이란다. 사랑한다, 결혼하자는 말을 믿고 흥분한 사람만 바보 되는 꼴이다.
▼세계적 경지에 이른 ‘로미즘’▼
대통령 선거 이후 ‘잃어버린 1년’이니, 30년 경제성장을 까먹고 있느니 개탄의 소리가 높지만 따지고 보면 10년 같은 1년 동안 배운 것도 많다.
첫 번째가 말은 함부로 해도 괜찮다는 점이다. 남아일언중천금(男兒一言重千金)이라거나 관(棺)속에 들어가도 막말은 하지 말라는 옛말은 헛소리였다. 국정 최고 지도자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바꾸는데 보통사람이야 혼인을 빙자하든 사기를 치든 무슨 대수랴. 원하는 것을 얻을 수만 있다면.
게다가 대통령의 막말은 시시한 실수가 아니었다. 초창기엔 감동으로 유권자를 사로잡았고, 지금도 지지자는 결집시키되 국민을 어지럽게 또는 무관심하게 만들며, 반대파는 기막혀 제 명에 못살게 하는 고난도 전략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봐야 한다. 부시즘(Bushism·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경우) 러미즘(Rummyism·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에 이어 가히 ‘로미즘(Rohmism)’이라 명명할 만한 경지다.
미국 퍼듀대 신시아 엠리치 교수는 ‘이미지에 기반한 수사학을 활용하는 대통령일수록 인기 있고 위대하다’고 했다. 단 인기와 위대함이 일치하는 건 아니라는 그의 지적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인기 있는 리더는 정서를 자극할 뿐이지만 위대한 리더는 비전을 말하되 업적으로 뒷받침한다는 것이다.
말이 씨가 된다는, 이미 조상님의 검증이 끝난 옛말이 존재한다는 점도 꺼림칙하긴 하다. 대통령 못 해 먹겠다거나 시민혁명을 촉구했던 말이 불행한 결과로 현실화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대통령에게 배운 두 번째는 성격이 운명이라는 사실이다.
한국정치학회에서 학술적으로 분석한 우리 대통령의 성격은 외향적 사고감각형이다. 긍정적으로 작용하면 개혁적 성향으로 사회정의를 구현할 수 있으나 반대로 움직이면 자기중심적 공격적 충동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했다.
안타깝게도 대통령은 부정적인 쪽을 더 많이 보여줬다. ‘로미즘’을 포함해 제발 그 불뚝 성격 좀 고쳐 주십사고 암만 빌어도 절대로 안 듣는다. 386측근이 놓아주질 않아 그런 줄 알았는데 상당수가 비리로 떠난 이제 보니 그것도 아니었다.
기실 성격이라는 건 좀처럼 안 바뀌는 법이다. 스스로 옳고 머리 좋으며 그 덕에 늘 인생역전을 해 왔다고 여겨 온 대통령의 기질이 자신의 운명을 개척한 건 좋으나 지금은 나라의 명운을 우왕좌왕케 하고 있다. 대통령후보 시절 그의 부인은 “왕후장상이 따로 없다는 걸 남편이 보여주고 있다”고 했지만 리더의 자질이란 타고난다는 과학적 연구결과를 곱씹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얻어지는 세 번째 교훈이 역시 교육은 중요하다는 거다.
천성은 못 바꿔도 갈고 닦는 건 가능하다. 그게 교육의 힘이다. 대통령은 학벌 철폐 등 5대 차별 철폐를 천명했으나 불행히도 대통령은 그 반대 방향으로 국민을 몰아가고 있다.
▼역설적 교훈이 고맙다 ▼
교육의 중요한 목적 중 하나가 사회변화에 적응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라고 미국의 사회학자 랜달 콜린스는 강조했다. 폭넓은 지식을 쌓지 않은 대통령이 80년대 386동지로부터 습득한 ‘의식화교육’에 사로잡혀 21세기 세계 변화엔 둔감하다는 건 국민의 불행이다. 국가와 시장의 상호작용이 곧바로 국제경쟁력이 되는 경제 글로벌시대에서 작은 나라가 살아남으려면 유능한 정부를 갖는 게 무엇보다 중요한 판에 말이다.
그러나 역설적 교훈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덕분에 우리 아이들 부지런히 닦아세워 좋은 교육 받게 하면 그게 남는 장사다.
이렇게 얻은 점이 많고 보면 우리 대통령은 참으로 고마운 리더가 아닐 수 없다. 대통령에게 배운 이런 모든 것들이 새해 갑신년을 풍요롭게 만들어 주길 기대한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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