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티토'…대화와 타협의 지도자 '인간 티토'

  • 입력 2003년 12월 26일 17시 1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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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토는 사냥을 좋아했고 담배를 하루에 100개비 이상 피우는 골초였다.사진제공 을유문화사
티토는 사냥을 좋아했고 담배를 하루에 100개비 이상 피우는 골초였다.사진제공 을유문화사
◇티토/재스퍼 리들리 지음 유경찬 옮김/536쪽 1만8000원 을유문화사

1980년 5월 7일 유고 베오그라드시 인근 수르친 공항에 세계 각국의 고위급 인사가 탑승한 비행기들이 속속 도착하고 있었다.

4명의 왕, 31명의 대통령, 22명의 총리, 47명의 외무장관 등 모두 128개국의 대표가 입국했다. 영국의 마거릿 대처 총리, 독일의 헬무트 콜 총리, 소련의 레오니트 브레주네프 서기장 등이 참석했고 건강을 이유로 참석하지 않은 미국 지미 카터 대통령에 대해 영국의 더타임스는 ‘그는 갔어야 했다’는 제하의 기사를 실었다. 이 어마어마한 모임은 35년간 유고 연방을 다스린 요시프 브로즈 티토 대통령(1892∼1980)의 장례식.

우리에겐 ‘유고식 수정 사회주의’와 ‘소련과 다른 독자노선’을 추구한 유고 대통령 정도로만 알려져 있는 티토는 전세계 대부분의 나라에서 그의 죽음을 애도할 정도로 20세기의 위대한 지도자였다.

티토는 냉전시대 ‘제3세계’라는 중립지대를 만들어 세계평화에 기여했고 식민주의 종식에 힘을 아끼지 않았다. 세계의 화약고라는 발칸반도에서 분쟁의 불씨를 잠재웠다.

크로아티아의 변방에서 가난한 농부의 15남매 중 9번째로 태어난 그는 13세에 초등학교를 마친 것이 학력의 전부. 철공소 막노동꾼으로 전전하다가 1차 세계대전 직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군대에 입대했다. 세계대전 중 포로가 돼 러시아 수용소에서 5년 동안 고초를 겪었으며 유고로 돌아와 공산주의자가 됐다. 2차 세계대전 중 파르티잔을 이끌며 나치에 대항했고 종전 후 유고의 최고 실력자가 됐다.

그는 공산주의자였지만 현실을 유연하게 받아들였다. 특히 스탈린의 교조적 공산주의에 철저히 반대해 “부르주아 자본주의의 횡포도 싫지만 스탈린과 소련의 만행에도 눈감아 줄 수 없다. 그렇다고 공산주의까지 포기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과 소련 어느 쪽에 일방적으로 기울지 않았으며 제3세계와 함께 비동맹그룹을 만들었다. 중국의 저우언라이(周恩來), 인도의 네루, 이집트의 나세르,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등은 그의 절친한 동맹자였다.

티토는 유고의 뿌리깊은 민족 분쟁을 타협과 대화로 풀었다.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코소보 보스니아 등을 하나의 연방으로 유지하면서 ‘유고인’이라는 개념을 만들었고 공직(公職)을 배정할 때 모든 인종을 적절히 배합했다.

‘노동자 자주관리’라는 제도로 시장경제를 도입했으며 1974년에는 유고 연방내 공화국들에 탈퇴를 포함한 모든 권한을 주는 헌법을 제정했다. 물론 그는 현대 민주주의 관점에서 보면 분명 독재자였다. 그의 장기집권 치하에서 비밀경찰에 의한 인권유린이 자행됐고 1만2000여명의 정치범이 악명 높은 고리 오토크 수용소에 갇혔다. 언론과 출판에 대한 탄압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통치한 기간 동안 유고에서는 평화와 공존의 원칙이 지켜졌다. 그의 사후 10년도 지나지 않아 유고는 6개의 공화국으로 분리돼 서로를 학살하는 ‘인종 청소’가 벌어졌다.

서정보기자 suh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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