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J그룹 장계원 상무 "내게서 女子의 눈물을 찾지마라"

  • 입력 2003년 12월 25일 18시 1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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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삼성그룹에 입사해 21년 만에 임원에까지 오른 CJ GLS 장계원 상무. 그는 ‘CJ그룹 첫 여성 임원’보다 ‘새로운 출발을 앞둔 신입사원’이라고 불러달라고 말했다. -김미옥기자
1982년 삼성그룹에 입사해 21년 만에 임원에까지 오른 CJ GLS 장계원 상무. 그는 ‘CJ그룹 첫 여성 임원’보다 ‘새로운 출발을 앞둔 신입사원’이라고 불러달라고 말했다. -김미옥기자
“당신, 임원으로 승진했소.”

고객사 간부와 저녁을 먹고 있을 때였다. 회사 사장이 전화를 걸어와 난데없이 승진 이야기를 꺼냈다. 무슨 말인지 곧 이해가 되지 않았다. ‘웬 전화가 이리 퉁명스럽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상무 승진 발표는 내일 있으니 그렇게 아시오.”

멍했다. 처음에는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그러다 갑자기 돌아가신 엄마 얼굴이 떠올랐다. 이유는 없었다. 좋은 성적을 받아오면 칭찬해주는, 그런 엄마의 칭찬 한마디가 들려오는 듯했다.

1996년 CJ그룹이 생긴 이후 첫 여성 임원이 된 CJ GLS 장계원(張桂媛·52) 상무. 그는 지난달 승진 소식을 이렇게 전해 들었다.

#입사…나는 남자다장 상무가 CJ의 전신이었던 삼성그룹에 입사한 때는 1982년. 당시 삼성이 대졸 신입사원 대신 28∼32세 기혼 여사원을 처음 모집했다.

중학교 영어교사였던 장 상무에게는 ‘하늘이 내린 기회’였다. 남들은 교사직을 ‘안정적인 직장’이라고 부러워했지만, 매번 교실만 바뀌고 수업 내용을 되풀이해야 하는 ‘앵무새 직업’이 도저히 적성에 맞지 않았기 때문.

당시 32세였던 장 상무는 30여명의 동기와 함께 삼성에 입사했다. 나름대로 ‘기혼여성 삼성 공채 1기’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삼성중공업 기획실(2년), CJ 기획실(4년), CJ 해외사업부(4년) 등을 두루 거쳤다.

“저 자신에게 무척 엄격했어요. 의식적으로 여자라는 사실을 잊어버리려고 했죠. 여자라고 봐주는 데 익숙해져 버리면 그걸로 끝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장 상무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생리휴가를 써 본 적이 한번도 없다. 아이가 30도가 넘는 고열에 시달리며 정신을 차리지 못할 때도 매몰차게 회사에 출근했다. 남들보다 1.5배 더 일한다는 생각으로 야근을 자청해서 도맡아 했다. 그렇게 힘들게 일했더니 더 이상 두려운 게 없더란다.

#과장…위기의 순간남자 직원들은 대리에서 통상 3년이 지나면 과장으로 진급한다. 빠르면 2년 반 만에 승진하기도 한다. 장 상무는 4년이 지나도 승진 소식이 없었다. 남들보다 일은 더 잘하는 것 같은데 진급이 계속 늦어지니 조바심이 났다. ‘내가 이 조직에 계속 있어야 하나…’ 하는 고민도 찾아왔다.

그러던 차에 갑자기 CJ 물류개선실로 발령이 났다. 영업에서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직원을 물류로 보낸다고 할 만큼 물류는 한직이었다. ‘사표를 내야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가족에게도 조심스럽게 뜻을 내비쳤다. 그랬더니 고등학생 큰아들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초등학교 다니면서 엄마가 정말 필요했을 때는 일만 하고 사셨지요. 이제 다 커서 뭐든지 혼자 할 수 있는데 엄마가 가족을 위해 돌아오신다고요?”

정신이 확 들었다. 아들의 짧은 말 한마디가 현실을 도피하려는 자신을 ‘콕’ 짚어 주었다. 다시 한번 이를 악물게 됐다.#부장…당신이 여자야

물류개선실로 와서 과장 승진도 했지만 그는 신입사원처럼 열심히 뛰어다녔다. 남자 직원들과 야근을 하며 함께 라면을 끓여먹고, 회식 자리에도 빠지지 않았다. 술을 한잔 걸치면 욕도 한두 마디 뱉어가며 거친 물류 업무를 익히기 시작했다.

부장으로 승진한 뒤 기업 물류를 따내기 위해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하면서 일주일간 잠도 자지 않고 남자 상사들과 함께 작업할 때였다. 갑자기 한 상사가 불쑥 말했다. “아니, 당신이 여자요?”

하지만 남성들의 시각은 참으로 이율배반적이다. 한번은 술을 심하게 마셔 길거리에서 구토까지 했다. 그랬더니 당장 말이 바뀌었다. “아니, 여자가 말이야.” 10년이 지났지만 ‘구토 사건’은 아직도 되풀이되고 있다.

“남자 직원들과 함께 치열하게 일하되, 여성으로서의 품위를 잃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서 직장 다니는 여성은 더 힘든 것 같아요.”

#상무…희망을 주는 선배자신이 CJ GLS 내에서 첫 여성 임원이 됐다는 사실은 여성 후배들이 볼 때는 ‘희망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장 상무는 어깨가 무겁다.

“아끼는 후배일수록 더 엄하게 대합니다. 여자 후배라고 봐주는 건 전혀 없어요.”

장 상무가 한번 호통을 치면 4층 전체가 쩌렁쩌렁 울린다. 때로는 3층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이 놀라 올라오기도 한다. “저의 입사 동기가 33명입니다. 지금 몇 명이나 남아 있을 것 같아요? 저 혼자입니다. 그만큼 여성이 일과 가정을 다 챙기기는 쉽지 않죠.” 장 상무는 현재 87세의 시어머니를 모신다. “영업을 하려면 골프가 필수”라는 주위의 권고도 무시한 채 주말에는 가정만 돌본다. 일 열심히 하고, 시어머니 잘 모시니까 정년퇴직한 남편도 후원자가 돼 주었다.

“제가 못하면 후배 여사원들이 얼마나 기가 죽겠어요. 새로 맡은 기업물류 영업직도 멋지게 해 보이겠습니다.” 여장부 장 상무의 당찬 새해 포부다.

박형준기자 lovesong@donga.com

▼美 500대기업 여성임원 15.7%…국내는 17개사 19명 ▼

우리나라 대기업에는 여성 임원들이 얼마나 있을까.

올해 5월 채용정보업체 인크루트가 대기업 105개사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여성임원이 있는 기업은 17개사(16%). 모두 19명에 불과했다.

여성 임원을 키우기 위한 제도적 장치도 부실한 상태. 여성 관리자 육성책이 있는 곳은 13개사(12%)에 그쳤다. 여성 관리자 육성책으로는 교육이나 시설 등에 대한 투자, 여성채용할당제, 탄력적 출퇴근제도 등이 있었고, 여성승진할당제를 시행하는 곳은 없었다.

외국 선진국과 비교하면 한국의 여성 임원 현실은 더욱 초라해진다. 여성개발원에 따르면 미국 500대 기업의 여성임원 비중은 1995년 8.7%, 2000년 12.5%, 2002년 15.7%로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에 있다.

2000년 기준으로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은 미국 77%, 영국 68%, 유럽연합(EU) 72% 등이었으나 한국은 50%에 그쳤다. 이광석 인크루트 대표는 “출산이나 육아 등에 대한 문제로 여성이 중도에 직장을 그만두는 경우가 많아 여성 관리자의 비중이 낮다”고 분석했다. 그는 또 “대부분의 기업들은 여성의 채용할당제나 승진할당제에 대해서는 또 하나의 차별이라는 이유로 반대했다”고 덧붙였다.

한국여성노동자회협의회 임윤옥 사무국장은 “영업 업무나 술자리 문화 등이 남성 위주로 짜여져 있다보니 여성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통로가 막혀 있다”며 “특히 고위직인 경우 남성들 사이에 강력한 네트워크가 짜여져 있어 남녀가 동일한 조건에서 경쟁할 수 없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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