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삶]'사회책임투자펀드' 만든 성심수녀회 이열 수녀

  • 입력 2003년 12월 23일 18시 4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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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책임을 위한 시민연대(CCSR)’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는 이열 수녀가 23일 사회책임투자(SRI)에 관한 브로슈어를 들고 SRI 펀드 운용 계획을 설명하고 있다. 이날 평상복 차림으로 기자를 만난 이 수녀는 자신이 속한 수도회는 몇 년 전부터 수녀복을 입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권주훈기자
‘기업책임을 위한 시민연대(CCSR)’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는 이열 수녀가 23일 사회책임투자(SRI)에 관한 브로슈어를 들고 SRI 펀드 운용 계획을 설명하고 있다. 이날 평상복 차림으로 기자를 만난 이 수녀는 자신이 속한 수도회는 몇 년 전부터 수녀복을 입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권주훈기자
“수도자라고 해서 이슬만 먹고 사는 건 아니잖아요. 하느님의 일을 하는 데도 돈은 필요해요. 그리고 그 돈을 잘 활용하면 사회와 기업을 변화시킬 수도 있습니다.”

수도회의 돈을 관리하는 재무담당 수녀들은 요즘 같은 저금리 시대에 어떤 고민을 할까. 성심수녀회 재무실장이자 ‘기업책임을 위한 시민연대(CCSR·이사장 함세웅 신부)’의 운영위원장인 이열(李悅·50) 수녀의 고민은 적어도 몇 %의 수익률 차원은 넘어서 있었다. 23일 기자 앞에서 자분자분 풀어낸 그의 ‘돈 철학’은 기업윤리와 주주들의 책임투자로까지 거침없이 이어졌다.

CCSR는 이날 성당이나 수도회의 돈을 모아 사회기여도가 높은 기업에 투자하는 이색 펀드를 세상에 내놓았다. 제일투자증권과 손잡고 만든 사회책임투자(SRI·Social Responsible Investment) 펀드가 바로 그것. 재무담당 수녀들이 속한 ‘장상연합회’ 회원도 일부 참여하고 있다.

SRI 펀드는 기업의 재무적 성과뿐 아니라 인권 환경 노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회적 성과를 거두는 기업에 투자하는 활동. 적극적인 주주 행동을 통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장려하고 감시하는 역할도 한다. 술 담배 무기 도박 등과 관련된 업체는 투자대상에서 제외된다.

미국에서 베트남전쟁 당시 투자자들이 전쟁 관련 기업에 대한 투자를 거부하면서 일어난 이 운동은 한국에서는 아직 걸음마 단계. 이 수녀가 이 펀드의 잉태에서 출생까지 실질적인 ‘어머니’ 역할을 해낸 주역이다. 1997년 말 이 수녀가 해외의 ‘윤리투자’에 관한 자료를 우연히 접하면서 궁리가 시작됐다.

“이익뿐 아니라 복음정신에 따라 투자하는 게 가능하다는 생각을 그전엔 해본 적이 없어요. 사회책임투자라는 아이디어에 바로 매료됐죠. 당시 외환위기로 수도회 자금관리도 크게 어려울 때였지요. 사회봉사와 상담, 가출소녀 쉼터 운영 같은 일을 하려면 어차피 돈을 굴려야 했어요.”

장상연합회 모임에서 SRI 펀드를 제안했지만 그 실현이 쉽지만은 않았다. 일찍이 대학원에서 금융 공부까지 한 지식으로 수도원 재정관리에 열성을 보여 온 그는 이 분야에 관심을 가진 장상연합회 수녀들과 함께 정기적으로 세미나를 갖는 등 공부를 해가며 펀드 설립을 도울 전문가를 찾아나선 결과 2000년 11월 CCSR가 만들어졌다. 함세웅 신부도 이 수녀의 강한 권유로 이사장직을 맡았다.

“CCSR가 첫 펀드를 선보이기까지 어려움이 많았어요. 처음엔 여성의 복지와 고용에 신경 쓰는 기업에 투자할 펀드를 추진했는데 데이터 부족 등의 문제로 실패했죠. 성직자들의 막연한 관심을 실제 투자 행위로 연결시키자니 정말 힘들더군요. 영국의 성공회나 퀘이커 교단이 SRI 단체들과 손잡고 활동하는 게 어찌나 부럽던지….”

일단 성당이나 수도원의 예산을 조금씩 모아 30억원 규모로 출범한 이 펀드는 국공채에 투자하는 머니마켓펀드(MMF) 형태여서 정식 SRI 펀드로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100억원대로 규모가 늘면 일반투자자들에게도 참여 기회를 주고 사회책임투자 대상기업을 본격 선별할 예정이다.

“SRI의 수익률은 다른 펀드에 비해 결코 나쁘지 않아요. 증시 침체기에는 오히려 일반 펀드보다 수익률이 높게 나온 해외 SRI 펀드도 많아요. 규모가 커지면 주주운동에도 나설 수 있을 겁니다. 기업을 변화시키지 않고 어떻게 사회를 하느님의 뜻에 맞게 변화시킬 수 있겠어요.”

이 수녀의 목소리에는 종교인의 신념과 금융전문가의 식견이 함께 묻어나고 있었다.

이정은기자 light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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