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대담]기업의 불법 정치자금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 입력 2003년 12월 22일 18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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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LG SK 현대자동차. 한국을 대표하는 이들 기업이 지난 대선 때 불법 정치자금을 전달한 사실이 밝혀졌다. 수백억원대의 정치자금은 그 자체로 기업 활동에 큰 부담이지만 기업의 대외적 신인도에 회복하기 힘든 손상을 가져온다. 불법 정치자금 문제가 불거지자 전국경제인연합회는 지난달 정치자금제도개선방안을 발표했고 이어 정부(정치권 포함)-기업-시민단체 등 3자가 참여하는 ‘반(反)부패 라운드테이블’ 구성도 제안했다. 동아일보는 이를 계기로 3자 대담을 마련했다.》

▽사회=SK에 이어 LG 삼성 현대차까지 불법대선자금을 준 정황이 드러났습니다. ‘기업용 보험’이라고 보기엔 액수가 크고 ‘총수용 보험’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승철 상무=한국은 ‘누구나 걸면 걸리는’ 법이 한 두 개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부당내부거래 금지 조항도 ‘부당내부거래’에 대한 정의가 없습니다. 담당공무원의 재량이 크다는 이야기입니다. 밉보이면 끝이지요. 이런 상황에서 경영자라면 미래의 위험을 피하고 싶은 유인이 생깁니다. 대선자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고계현 정책실장=그런 논리로 부패현상을 일반화·정당화하면 안 되지요. 특히 고액의 정치 비자금을 제공한 것은 반대급부를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사회 곳곳이 변하고 있는데 기업은 변화속도가 늦습니다.

▽이 상무=과거 5대 그룹에 속하는 한 재벌그룹 회장에게 “한번 마음을 독하게 먹고 모든 것을 투명하게 해보시지요”라고 말했더니, 그분이 “우리도 이미 해외법인에서는 그렇게 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시스템이 바뀌지 않고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사회=정치자금 문제를 검찰수사로만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정치자금을 정상적으로 조성 배분하는 새로운 시스템이 필요하겠지요. 정부 쪽에서는 어떤 구상을 하고 있습니까.

▽김경중 정책기획실장=정치권은 수혜자여서 변화속도가 늦습니다. 공급자인 기업이 먼저 변해야 합니다. 정치권 요구에 대해 기업들이 “분식회계를 통한 비자금 조성은 불가능하다” “주주 동의가 필요하다”는 식의 구실을 댈 수 있도록 해줄 필요가 있습니다. 이를 위해 증권거래법과 상법을 개정할 수도 있겠지요. ‘너만 잘못했다’는 태도는 옳지 않습니다. 해법을 찾아 윈-윈(win-win)으로 나가야 합니다.

▽고 실장=기업이 처한 어려움을 압니다. 그러나 총수의 말 한마디로 정치자금이 불법 조성되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투명경영, 정직한 회계, 올바른 기업지배구조를 갖춰야만 이런 문제가 해결될 수 있습니다.

▽사회=그동안 전경련이 윤리경영을 주장해왔습니다. 성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직원들의 부패방지’에 쏠려있습니다. 대주주와 관련되는 부분에는 큰 무게를 두지 않고 있는 듯 보입니다.

▽이 상무=전사적 자원관리(ERP) 도입이후 투명성이 높아지면서 오너가 가장 좋아하지요. (대주주가) 기업 돈을 빼돌리고 하는 일은 힘들어졌습니다. 애를 많이 쓰고 있습니다.

▽김 실장=과거 전경련에 강연을 나가면 “전경련이 ‘부패’라는 말을 쓰지 말아달라”고 요청하곤 했습니다. ‘윤리’라는 말로 대신하자는 거지요. 그때에 비해서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그러나 윤리경영 수준이 한 단계 더 올라갔으면 합니다.

▽사회=전경련은 얼마 전 반부패 3자연대와 정치자금제도 개선안을 제안한 바 있습니다. 큰 진전이 아닐까요.

▽김 실장=3자연대와 관련해 정부차원에서도 함께 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 중입니다. 우리는 3자 테이블을 ‘협의체’로 봅니다. 이미 정부에 사정기관협의체가 있는 만큼 3자 테이블에서 도출된 좋은 방안을 여기에 상정할 수도 있습니다. 시민단체도 참여하면 좋겠습니다.

▽고 실장=아직도 (전경련의 변화가) 진정한 변화라는 느낌이 와 닿지 않습니다. 진실한 고백을 통해 과거와 결별하는 ‘자기결단’이 필요합니다. 이런 과정 없이 연대하다가는 함께 매몰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주저하게 됩니다. 신뢰가 형성되지 않았어요.

▽이 상무=아직도 (외부에서 재계의 변화노력에) 신뢰감을 갖지 못하는 점 잘 알고 있습니다. 재계도 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쪽은 그대로 있고, 기업만 달라지는 것은 어렵습니다.

▽고 실장=재계는 회계장부를 파기하는 등 수사 장기화를 자초한 측면이 있습니다. 또 재계는 정치자금 투명화를 얘기하면서 실제로 이를 강제할 수 있는 주주대표소송, 집중투표제 등 제도도입에 대해서는 모두 반대하고 있습니다.

▽김 실장=부패문제가 많이 개선됐는데도 불구하고 국제투명성기구 등 국제사회에서 한국을 보는 시각이 개선되지 않은 이유는 바로 ‘거대 부패’ 때문입니다. 기업이 변해야 합니다. 시민단체도 (기업에) 어려운 일을 한꺼번에 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회=삼성과 LG까지 거액의 불법대선자금을 건넨 것으로 밝혀지면서 기업신인도가 당장 큰 부담입니다. 장기적으로야 개선효과가 있겠지만, 단기적으로는 큰 충격인데요.

▽이 상무=우리야 ‘선거 때마다 겪는 일’이지만 외국인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동안의 기업이미지 개선노력에 큰 손상이 갔습니다. 외국에서는 ‘한국에서 사업을 하려면 저렇게 하는 거구나’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제도개선을 해야 합니다. 시스템을 바꾸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김 실장=그런데 이는 우리 사회가 좋은 쪽으로 노력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결과입니다. 이 같은 노력조차 하지 않는 국가에는 이런 일도 없습니다. 국제기구에 한국 상황을 알리기 위해 영문으로 작성한 설명자료를 준비 중입니다. 한국에 있는 외국 기업인들에게도 영문 자료를 배포할 예정입니다.

▽사회=전경련이 제안한 지정기탁금제 부활은 원칙적으로 옳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될 경우 친(親)기업 정당으로만 후원금이 몰리지 않을까요. 또 전경련이 정치자금 모금창구 역할을 하겠다는 것에 대해 최근 전경련이 겪고 있는 정체성 위기 극복의 방편이 아니냐는 시각도 있는데요.

▽이 상무=과거 지정기탁금은 거의 100% 여당에 몰렸습니다. 그러나 정권교체 이후 달라졌습니다. 정치자금의 속성상 ‘올 인’은 불가능합니다. 만약 회원사가 ‘비(非)지정’으로 기탁한다면 ‘전경련이 모금창구가 되겠다는 것은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의도’라는 지적은 옳습니다. 그러나 지정기탁이 99.9%일 겁니다. 전경련은 영수증만 떼어주는 역할에 불과합니다.

▽고 실장=전경련이 ‘재계의 이익단체’라는 것은 세상이 다 알고 있습니다. 정치자금 통로를 선관위로 한정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사회=부방위에서는 한국의 부패수준을 어떻게 보고 있나요. 부패는 우리의 숙명일까요.

▽김 실장=한국은 경제규모가 세계에서 12∼13위인데도 불구하고 투명성에서는 그렇지 못합니다. 국제투명성기구에서 10점 만점으로 투명성을 측정해보면 한국은 아직도 5점을 넘지 못하고 있습니다. 부패퇴치 노력이 예방차원이 아니라 불이 나면 달려오는 소방차 식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정치와 경제가 결탁된 ‘거대 부패’가 여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반드시 달라지리라고 생각합니다.

정리=공종식기자 k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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