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확인전화 한통 없었다"…`덕소모임` 보도 허점투성이

  • 입력 2003년 12월 21일 19시 1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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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욱 前주필
이동욱 前주필
1971년 6월 2일 덕소별장 모임 당시 이동욱(李東旭) 동아일보 주필을 비롯한 참석자들은 한국문화에 대한 이해가 깊지 않은 윌리엄 포터 주한미국대사의 스케치성 비밀전문에만 의존한 KBS의 ‘미디어 포커스’ 보도가 허점투성이라고 지적했다. 원로언론인인 이들은 또 “KBS 관계자들로부터 사실 확인을 위한 전화 한 통 받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다음은 문답형태로 종합한 이들의 증언 요지.

―덕소모임을 갖게 된 배경은….

“포터 대사가 미국 의회에 양대 선거를 전후한 한국의 민주화 진전 상황을 보고하러 간다기에 환송을 겸해 모임을 가졌다. 올해 초까지 KBS 사장을 한 박권상 당시 동아일보 편집국장이 모임을 주선했다. 일민(一民·김상만 당시 동아일보 사장)은 1971년 대선과 총선을 거치면서 크게 약진한 한국의 민주화가 속히 안정되기를 바랐다. 그리고 자유당 정권 이래 독재와 싸워 온 동아일보가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모임에선 무슨 이야기를 나눴나.

“심각한 정치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았다. 주로 덕담들을 주고받았다. 대선에서 패배한 뒤 차를 타고가다 트럭에 받혀 병원에 입원한 김대중씨를 처음 만난 자리여서 그를 위로하는 말들이 많았다. 다만 김영삼씨가 ‘선거하려면 공명선거를 해야제, 입으로만 공명선거 떠들고 행동은 하나도 안 하고 말이야’라고 일갈한 기억이 난다. 이에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시시한 이야기 지껄이지 말라’고 즉각 맞받았다.”

―1980년 ‘서울의 봄’에도 일민의 초청으로 3김(金)이 인촌기념관에 모였는데….

“일민은 해마다 한두 차례 여야 지도자와 외교사절 등을 계동의 인촌기념관으로 초청해 저녁 식사를 함께했다. 여야가 싸우지만 말고 화합해서 민의를 잘 대변해 달라는 뜻으로 마련한 자리였다. 문제가 있어도 한자리에 모여 대화로 풀어야 한다는 것이 일민의 지론이었다. 동아일보만이 그런 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으나,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이후엔 그것도 없어졌다.”

―당시 동아일보가 왜 정권의 탄압을 우려했나.

“언론 환경이 몹시 험한 시절이었다. 정권에 맞설 수 있는 것은 동아일보뿐이었다. 3선 개헌 반대 사설을 쓴 것도 동아일보가 유일하다. 그래서 포터 대사도 동아일보가 가장 공정보도에 가까운 보도를 한다고 인정하지 않았겠느냐. 당연히 정권에는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대선을 코앞에 둔 4월 15일엔 동아일보 기자들이 ‘자유언론수호선언’을 하고, 편집국에 상주하다시피 하던 정보기관원을 쫓아내기도 했다.”

―그렇다면 포터 대사가 모임의 초점을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에게 맞춘 이유는….

“여야 3명씩의 초청대상엔 본래 김종필씨가 들어 있었으나 지방에 내려가는 바람에 대타로 급히 이 부장을 초청했는데 다행히 응한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들으니 이 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혼이 났다고 하더라. 포터 대사는 이런 사실을 잘 모른다. 다만 동아일보에 동정적인 그는 선거 후 동아일보가 정치적 박해를 받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에 일민과 이 부장의 만남에 특히 의미를 둔 것 같다. 중앙정보부장이란 자리는 당시 무소불위였다. 개인적 판단이나 느낌을 많이 담은 포터 대사의 비밀전문엔 그 외에도 오류가 적지 않다. 마치 박권상씨가 2년 전에 런던으로 쫓겨간 적이 있는 것처럼 쓴 것도 사실과 다르다. 나중에 동아일보 사장을 역임한 김성열씨가 그랬던 것을 착각한 것이다.”

―실제로 덕소모임 이후 정권과의 관계가 개선됐나.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오히려 탄압이 더 심해졌다. 1974년 말부터는 광고 탄압이 시작되지 않았나.”

―모임에 여자들도 참석했는데….

“그와 관련한 비밀전문의 내용이 가장 어처구니가 없다. 포터 대사가 한국 사정에 밝지 않아 오해를 했거나 아니면 모임의 성대한 분위기를 강조하기 위해 과장했을 가능성이 있다. 단순히 음식 서빙을 위해 서울시내의 한 음식점에서 여종업원을 7, 8명 정도 불렀을 뿐이다. 그 밖에 유학을 마치고 갓 귀국한 성악가 이모씨(별세)와 바이올리니스트 박모씨 등 여성음악가 2명도 덕소별장을 방문했으나 정치인들 모임엔 합석하지 않았다. TV탤런트니 뭐니 모두 당치도 않은 말이다.”

―미국측은 당시 한국 언론을 이용하려 했나.

“다른 모든 언론이 비슷한 목소리를 내고 동아일보만 다른 목소리를 냈는데 굳이 이용하고 말고 할 필요가 없었다. 지금은 미국과 한국의 국익이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당시는 양국의 국익이 거의 일치했던 시기다. 대미 경제의존도도 컸고 외교도 양국이 보조를 같이했다. 미국식 민주주의는 우리의 꿈이었고 냉전시대 미국은 자유진영의 리더였다.”

―KBS 보도에 대한 소감은….

“포터 대사의 비밀전문 내용은 이미 3년여전에 신동아에 보도됐는데 KBS는 그중에 기획의도에 맞는 언급들만 골라내 서툴게 짜깁기한 느낌이다. 게다가 사실확인에 충실하지도 않았고 의미해석도 공정하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시대적 상황에 대한 최소한의 성찰도 결여돼 보도와 논평에 균형감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또한 KBS가 엄혹했던 시절을 어떻게 넘겨 왔는지도 되묻고 싶다.”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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