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비아, 대량살상무기 포기]`후세인 쇼크` 카다피의 고육책

  • 입력 2003년 12월 21일 19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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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국가지도자의 대량살상무기(WMD) 포기 선언은 대내외적인 변수가 상호 작용한 결과이다. 특히 미국 주도 연합군이 벌인 이라크전쟁과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의 체포가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정권 존립을 위한 결단=리비아의 WMD 포기 선언의 출발점은 3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카다피는 이라크전이 발발하기 직전에 협상을 제의했다. 사찰과 협상이 병행된 9개월은 이라크전의 전황 및 후세인의 동향과 맞물려 돌아갔다.

사찰은 10월과 12월 초 리비아가 몇몇 핵 프로그램과 관련된 실험실과 군수공장을 공개하면서 급진전됐다. 이 시점은 이라크에서 저항세력의 공세가 눈에 띄게 주춤했던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또 리비아의 WMD 포기 실무협상이 극적으로 타결된 날은 후세인이 미군에 체포된 지 이틀 만인 16일이었다.

이는 카다피가 WMD 개발을 시도하는 것만으로도 정권 존립이 위태롭다고 생각했으리라고 충분히 유추할 수 있는 정황이다. 미국 뉴욕 타임스는 리비아 망명자의 말을 인용해 “그(카다피)의 관심사는 권좌에 남아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피폐한 경제 탈출구=리비아는 미국으로부터 테러 지원국이라는 낙인이 찍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시절부터 경제제재를 당해왔다. 1988년과 89년 미국과 프랑스의 민항기 폭파사건으로 92년부터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까지 제재에 나섰다.

유엔은 99년 금수조치를 잠정 중단했지만 미국은 2001년 리비아 에너지부문에 연간 2000만달러 이상의 투자를 하는 외국기업을 처벌할 수 있도록 기존의 리비아 제재법을 한층 강화했다. 리비아는 올 9월 민항기 폭파에 따른 보상에 합의해 서방에 화해의 손길을 내밀기도 했다.

석유수출국기구(OPEC) 중 7위 산유국인 리비아는 원유 수출을 봉쇄당하면서 경제가 극도로 피폐해졌다. 영국 BBC가 리비아를 소개하는 기사에서 국민소득을 ‘입수 불가능’으로 처리할 정도였다.

모하메드 압델라만 살캄 리비아 외무장관은 “이번 WMD 포기 선언으로 리비아 정부가 보상을 받기 바란다”며 “우리 국민의 이익을 위해 미국 영국과 유대관계를 맺기 원한다”고 말한 것으로 워싱턴 포스트는 전했다.

▽리비아의 WMD=미국과 영국은 “리비아가 핵무기 개발에 근접했다”고 평가했다. 가장 우려할 만한 WMD인 핵무기는 아직 만들지 못했다는 것이다. 미국과 영국의 무기전문가들은 그동안 리비아 내 10여곳을 방문해 사찰활동을 벌였다.

리비아는 우라늄 농축에 필요한 고성능 원심분리기와 부품들을 보유했다고 시인했다. 또 상당량의 농축 우라늄을 확보한 것으로 파악됐다. 뉴욕 타임스는 “리비아 과학자들이 핵무기 개발에 필요한 핵연료 처리방법을 개발하고 있었다”고 전했다.

리비아는 또 상당량의 겨자가스와 제1차 세계대전 때 사용됐던 화학작용제 운반용 폭탄을 공개했다. 겨자가스와 신경작용제를 만들 수 있는 원료물질도 다량 보유하고 있었다. 생물무기 개발에 필요한 장비를 구입하려고 시도한 것으로도 확인됐다.

리비아는 이 밖에 사거리 300km 이상의 스커드 미사일과 무게 500kg 이상의 탄두도 폐기하겠다고 밝혔다. 리비아는 스커드 미사일의 사거리 연장을 위해 북한과 협력했다는 점도 시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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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기자 leej@donga.com

▼카다피 누구인가▼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국가지도자(61)는 일부 반미 아랍국가들 사이에서는 ‘아랍의 영웅’으로 불린다. 하지만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이 그를 ‘중동의 미친 개’라고 부른 데서 알 수 있듯이 그는 항상 서방측의 제거대상 1호였다.

리비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청년장교들을 모아 자유장교단을 결성했던 그는 27세 때인 1969년 9월 국왕 이드리스 1세가 해외여행을 나선 틈을 타 무혈쿠데타로 왕정을 무너뜨렸다.

그는 아랍전통과 사회주의를 결합한 독특한 사회체제를 형성했다. 서구식 의회민주주의를 비난하면서 직접 민주제인 ‘인민권력(Jamahiriya)’ 체제와 코란으로 정치 사회적 틀을 갖췄다. 엄격한 이슬람 율법에 입각해 음주와 도박을 금지했다. 기층민중의 해방을 외치며 부자들의 자녀를 강제로 군에 입대시키는 등 파격적 정책을 실시했다.

저서 ‘녹색서(The Green Book)’를 통해 중동지역에 단일 아랍국가를 건설해 아랍민족주의를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 72년 이집트와 아랍연합 결성에 합의하고 80년 시리아와 합방을 발표하기도 했으나 실패했다.

그는 미국 내 이슬람교 연합과 혁명단체인 ‘블랙팬더’를 지원하는 등 극렬한 반미 정책을 추진하다 86년 3일간에 걸친 미국의 공습으로 죽음의 위기를 겪기도 했다.

88년 270명의 목숨을 앗아간 스코틀랜드 로커비 상공 미국 팬암사 여객기 폭파사건 이후에는 미국 주도의 국제적인 경제 제재를 받았다.

그러나 장기간의 경제 제재로 경제난에 시달리다 99년 팬암기 폭파용의자 2명을 유엔에 넘기면서 국제무대에 복귀하기 위한 움직임을 시작했다.

박혜윤기자 parkhy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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