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내엔 손님이 없어요" 인천공항서 밤새우는 모범택시

  • 입력 2003년 12월 19일 18시 2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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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오전 2시 인천국제공항 장기주차장. 모범택시 20여대가 주차장에 줄지어 서 있었다. 앞면 유리창에는 성에가 끼지 않도록 신문지가 덮여 있었고, 제복을 입은 택시 기사들이 무료한 표정으로 운전석에 앉아 있었다. 이날 인천공항의 새벽 기온은 영하 5.3도∼영하 3.9도. 오전 2시 이후로 손님을 태우지 않은 검은 모범택시들이 계속 주차장으로 몰려들었다. 최악의 불경기가 빚어내고 있는 빈 택시의 행렬이다. 》

▽매일 100여대 공항에서 철야=평일에는 50∼100대, 주말에는 100대 이상의 모범택시 기사가 이런 생활을 하고 있다.

“요즘 서울 시내에서 모범택시 타는 사람 있나. 연말인데 저녁에 회식도 안 하는 것 같다. 기름값이라도 벌려면 그나마 손님이 있는 인천공항에 와야지.”


오전 3시에 주차장에 들어온 택시 기사 김정래(金正來·62)씨는 이용객들이 거의 끊기면서 모범택시들이 공항으로 몰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공항에서 낮에 한 번 손님을 태우기 위해 이제는 아예 공항주차장에서 밤을 새우게 됐다는 것이다.

“작년에는 이맘때 낮에 여의도에 있으면 최소한 2, 3명은 태울 수 있었지만 요즘은 한 명도 없어.”

김씨는 “자식들이 그렇게 집에 들어와서 자라고 난리지만 아침에 시내로 출근하면 돈 4만원을 벌기가 불가능하다”며 “나이 예순에 차에서 침낭을 깔고 잔다”고 허탈한 표정으로 말했다. 김씨는 트렁크에서 큰딸(36)이 사준 닭털침낭과 합판, 베개를 꺼내 에쿠스 승용차 조수석에 깔고 잠을 청했다.

▽택시에 번호표 배부까지=오전 3시반이 되자 주차장에 줄 서 있던 모범택시 70여대가 주차장 출구로 나갔다가 U턴해 다시 들어오며 주차관리소에서 번호표를 받았다. 그때마다 주차관리소 옆에 설치된 전광판에 있는 ‘모범택시 대기차량’ 수도 하나씩 올라갔다.

기사들이 자체적으로 조직한 봉사위원회의 당번들이 경광봉을 들고 주차장을 다니며 차에서 깊이 잠든 기사들을 깨웠다.

기사들은 이 대기표 번호대로 낮에 공항청사로 갈 순서를 정한다.

이날 2번을 받은 김영환(金英煥·66)씨는 “9일째 집에 안 들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김씨는 전날 오전 7시40분 공항에서 손님을 태워 서울 강남구 역삼동 르네상스호텔에 내려준 뒤 오전 10시 공항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158번이 적힌 대기표를 받고 주차장에서 하루 종일 기다렸지만 순서는 오지 않았다.

“하루에 두번 뛰기 힘들어 하루 한번 손님을 태우려고 이 짓을 하는데 손님이 인천으로 가자고 하면 승차거부도 할 수 없어 그날 장사는 허탕치는 거지.”

인천공항에서 서울시청까지 손님을 태워 요금 6만3000원을 받으면 공항고속도로 통행료와 기름값을 빼고 4만원 정도가 남는다.

젊은 기사들의 경우 부인들이 돈도 벌지 않고 집에도 안 들어오는 남편을 의심해 밤에 공항주차장으로 찾아오는 사람도 종종 있다고 한다.

기사들은 “그나마도 공항청사 안에서 불법 호객행위를 하는 콜밴과 렌터카 운전자들 때문에 손해가 막심하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번호표 배부가 끝나자 기사들 몇몇은 휴대전화로 “지금 몇 번까지 번호가 나갔다”며 동료와 통화하는 모습도 보였다.

장강명기자 tesomio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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