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리뷰]'붉은 돼지'…'하늘의 해적' 잡는 낭만돼지

  • 입력 2003년 12월 18일 17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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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대원디지털엔터테인먼트
사진제공 대원디지털엔터테인먼트
애니메이션 ‘붉은 돼지’(1992년)의 키워드는 ‘캐스팅’이다.

이 작품에 앞서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이웃집 토토로’ 등을 통해 ‘저패니메이션(일본 애니메이션)’을 세계적 문화상품으로 끌어올린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62)은 돼지를 주인공으로 낙점했기 때문이다.

극중에서 등장하는 “감히 돼지 주제에…”라는 비아냥은 일본에서도 돼지에 대한 이미지가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미야자키는 대체로 왕성한 식욕과 무지를 상징해온 돼지에게 고독, 로맨스, 순수, 낭만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DNA’를 주입시켰다.

작달막한 키, 불룩한 배, 돼지 얼굴을 한 파일럿 ‘포르코’. 이탈리아의 한 무인도에 사는 그는 샹송을 들으며 담배를 피우고 낮잠을 즐긴다. 이따금 시간이 나면 그는 오랜 친구이자 해상호텔 아드리아노의 매력적인 여주인 지나와 대화를 나눈다.

이 작품에서 보여주는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라는 식의 의도된 설정은 전혀 어색하지 않다. 이 같은 불균형은 인간이라는 선택받은 종(種)이 지구상에서 끊임없이 벌여온 이유 없는 전쟁과 살육에 비하면 불합리할 것도 없다.

영화의 배경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20년대 말. 마법에 걸려 돼지가 된 공군 비행사 포르코는 바다가 아닌 하늘에서 해적 행위를 하는 ‘공적(空敵)’들을 잡는 현상금 사냥꾼이다. 공적들은 잇따라 포르코에게 패하자 부유한 미국 비행조종사 커티스를 고용한다. 커티스와의 대결에서 심하게 비행기가 파손된 포르코는 옛 친구 피콜로에게 수리를 의뢰하고 이 과정에서 피콜로의 생기발랄한 손녀 피오와 함께 섬으로 돌아온다.

이 작품은 사람이 돼지로 변신했다는 ‘마법’이 초월적 존재의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 포르코 자신의 선택임을 밝히면서 주제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포르코는 그를 추적하는 파시스트 경찰이 “국가에 기여하지 않는 파렴치하고 나태한 돼지”라고 비난하자 “애국은 인간끼리 해라” “파시스트보다는 돼지가 낫다”고 응수한다.

미야자키의 탁월함은 적절한 유머와 로맨스를 통해 묵직한 주제를 튀지 않게 표현했다는 점이다. 그는 처음 이 작품을 30~40분 분량의 단편으로 기획했지만 유고 내전과 소련 붕괴를 지켜보면서 장편으로 완성했다. 미야자키는 1941년생으로 2차 세계대전의 후유증에서 자유롭지 않은 세대이기도 하다. 이 작품의 프로덕션 노트에는 ‘이제는 지쳐 뇌세포가 두부가 되어버린 중년 남성들을 위한 애니메이션을 만들자’는 주장도 있다.

실제로 이 작품은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로맨틱하고 중년의 관객들이 공감할 수 있을 만큼 매력적이다. 19일 개봉. 전체 관람가.

김갑식기자 dunanwor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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