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줌인]소멀리에 ‘왕중 왕’… “와인 최고수를 찾아라”

  • 입력 2003년 12월 18일 16시 2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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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오전 9시 소멀리에 콘테스트가 열리고 있는 서울 신라호텔 영빈관. 검은 정장에 나비넥타이를 맨 젊은 남녀 5명이 긴장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이들은 얼마 전 소멀리에 전문지식을 테스트하는 필기시험에서 72명의 경쟁자를 물리치고 최종 예선에 오른 소멀리에들. 이들 중 ‘와인 최고수’를 가려내는 최종 실기테스트가 시작됐다. 심사위원은 고성민 한국소멀리에협회 협회장과 국제소멀리에 연맹 부회장인 조르주 페르튀제, 정혜정 우송대 외식조리학과 교수, 탤런트 박상원씨 등 8명. 참가자들은 각각 다른 방에서 기다리다가 자기 순서에만 시험장에 들어왔다.》

‘절대 미각’을 가려라

소멀리에는 와인의 맛과 향을 제대로 구분할 수 있어야 손님의 질문이나 요구에 즉각 대응할 수 있다. 이 때문에 평소 와인에 관한 미각을 키우기 위해 끊임없이 훈련한다.

각 와인의 독특한 향을 내는 망고 사과 로즈마리 등 다양한 재료의 냄새를 실제로 맡아보고 와인에서 그 냄새를 찾아내는 것도 반복한다. 잔을 돌려 와인이 흘러내리는 모양도 불빛에 비춰가며 세심하게 관찰하는 연습도 한다. 보통 잔에 묻은 와인이 천천히 흘러내릴수록 당도가 높은 고급와인으로 평가한다.

이번 콘테스트의 첫 번째 관문은 화이트 와인 1잔과 레드 와인 2잔을 주고 와인의 품종, 생산지, 생산연도, 등급을 맞히는 시험. 주어진 시간은 4분이다. 수천, 수만가지에 이른다는 와인의 맛을 이들은 과연 가려낼 수 있을까.

1번 참가자인 인터컨티넨탈호텔의 유병균씨는 잔에 담긴 화이트 와인을 돌린 뒤 냄새를 여러 차례 맡고, “후루룩” 소리를 내며 입안에서 와인을 세 번 굴렸다. 때때로 입안을 물로 헹구기도 했다. 하얀 테이블보에 와인의 색상을 비춰본 뒤 무거워 보이는 입을 열었다.

“진노란 색상에 꽃향과 과일향이 나며 산도가 적절한 것이, 이 정도면 1997년산 샤블리의 프리미엄급 와인인 것 같습니다.”

갤러리아백화점 에노티카의 이택진씨는 2분도 안돼 테스트를 마쳤다. 물로 입을 헹구지도, 냄새를 너무 오래 맡지도 않고 “후루룩” 소리도 두 번만 냈다. 정답인지 오답인지 상관 않겠다는 듯 단칼에 “2001년산 샤르도네로 만든 샤블리 지역의 와인”이라고 대답했다.

JW메리어트호텔의 은대환씨는 반대로 지나치게 시간을 끌어 일부 심사위원이 졸고 있을 정도였다. 그는 모든 와인의 맛을 보고 또 보고, 오래도록 냄새를 맡았으며 마치 흠집을 찾아내듯 색상을 꼼꼼히 관찰했다. 정답은 샤르도네 품종, 1998년산, 뫼르소지역의 상등급.

그러나 와인 품종 등을 맞히는 시험이 이번 콘테스트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의외로 아주 낮다고 고 협회장이 귀띔했다.

와인의 맛과 향은 비슷한 게 많기 때문에 와인에 대한 감각만 엿보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즉 맛과 향이 비슷한 와인을 댄다면 반드시 정답이 아니어도 테스트에 통과한다는 것. 하나의 맛을 느끼기 위해 한번 마시고 또 마시는 태도는 그래서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없다.

와인에 어울리는 음식

두 번째 테스트는 화이트와 레드 와인을 각각 1잔 올려놓고 이에 어울리는 음식을 말하는 것이다.

더 레스토랑의 김영신씨는 큰 키에 옆이 훤히 트인 긴 검정 치마를 입었다. 화이트 와인을 살펴본 그는 “연두색을 띠고 레몬 같은 과일향이 많이 나서 산도가 상당히 높은 이 와인에는…그릴에 구운 치킨을 권하고 싶다”고 말했다. 노란 색으로 무난하고 맛이 자극적이지 않은 것이 서로 잘 어울린다는 것. 그는 “한국 요리인 생선전도 잘 맞을 것 같다”고 했다.

프랑스 현지 레스토랑에서 근무하다 최근 귀국한 여성 참가자 조윤주씨도 한국 음식을 추천했다. 그는 레드 와인을 여러 차례 씹어 먹듯이 맛을 보다 “과일향이 풍부하고 탄닌이 좀 약하며 산도가 있기 때문에 고기 중에서도 연한 부위, 우리나라 음식으로는 서양식 허브를 곁들인 너비아니 구이가 좋을 듯하다”고 말했다.

다른 참가자들은 화이트 와인에는 바닷가재, 돼지목살고기 등을, 레드 와인에는 양갈비, 멧돼지고기, 오리고기 등을 제안했다. 대체로 무난한 답변이었다.

일반적으로 레스토랑에서 와인을 주문할 때면 생선에는 무조건 화이트 와인을, 육류에는 레드 와인을 선택할 뿐 세부적인 맛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러나 서한정 한국소멀리에협회 명예회장은 “같은 화이트 와인이라도 음식의 소스에 따라 더 세분화해 고를 수 있다”고 조언한다. 예를 들어 같은 생선요리라도 버터가 들어간 부드러운 맛이라면 가벼우면서 담백한 화이트 와인이, 톡 쏘는 향의 소스를 사용한 요리라면 소비뇽 블랑처럼 쏘는 맛이 강렬한 화이트 와인이 추천된다.

이번 참가자들에 대해 페르튀제씨는 “한국 소멀리에는 와인에 어울리는 한국 음식을 개발할 의무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고 협회장은 “한국 음식을 추천한 사람에게 높은 점수를 주자는 게 심사위원단의 공통된 의견이었다”고 덧붙였다.

'와인 최고수' 콘테스트 최종 결선에 오른 5인의 소멀리에들. 왼족부터 인터컨티넨탈 호텔의 유병균씨, 조윤주씨. 이 대회 우승자인 더 레스토랑의 김영신씨, JW메리어트호텔의 은대환씨,에노티카의 이택진씨. 이종승 기자

고객 즐겁게

마지막 테스트는 상황극이었다. 4명의 심사위원이 둥근 테이블에 앉아 음식을 주문하고, 그 음식에 맞는 와인을 물어보고 이를 서비스하는 과정을 보는 것.

주문을 받을 때 소멀리에는 자신의 지식을 총동원해 그에 어울리는 와인을 추천해야 한다. 같은 양갈비 메뉴라도 “맛이 좋으면서도 그다지 비싸지 않은 와인” “최고급 와인” “너무 무겁지 않은 와인” 등 요구사항이 달라졌다. 소멀리에가 와인을 추천한 이유를 설명할 때 많은 심사위원들의 고개가 끄덕여지면 합격점.

주문이 끝나자 참가자들은 고객의 오른편에 와인 잔을 올려놓고 와인을 디캔팅할 준비를 했다. 디캔팅이란 와인의 침전물이 따라 들어가지 않도록 호리병처럼 생긴 유리병에 와인을 옮겨 부어 서비스하는 것. 코르크 맛을 없애고 와인의 독특한 향과 맛을 살리기 위한 것이다. 침전물의 움직임을 자세히 볼 수 있도록 촛불을 반드시 준비해야 한다.

이날 오후 5시에 발표된 결과 김영신씨가 우승을 차지했다. 여성으로서는 최초다. 유씨와 조씨가 그 뒤를 이었다.

웨스틴조선호텔 등을 거쳐 소멀리에 경력 9년째인 김씨는 “세 번째 서빙 테스트에서 편안하고 안정되게 서비스를 해서 좋은 점수를 받은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로 김씨는 고객에게 주문을 받는 태도나 디캔팅하는 노하우, 와인을 서비스한 뒤 물러나는 태도까지 고객을 세심하게 배려하는 인상을 주었다. 그는 대회 우승으로 상금 500만원을 받았으며 ‘올해의 최고 소멀리에’로서의 자부심을 갖게 됐다.

고 협회장은 소멀리에의 자질에 대해 “고객이 와인과 더불어 즐겁게 식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자면 와인에 대한 지식이 많아야 하고 디캔팅을 하더라도 최상의 ‘쇼맨십’을 보여야 한다는 것.

서 명예회장은 “그대신 자신의 지식을 과시하고 잘난척하는 소멀리에가 돼서는 안 된다”고 덧붙였다.

하임숙기자 arteme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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