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호랑이의 혼…1811년 홍경래의 亂

  • 입력 2003년 12월 17일 18시 2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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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래가 성공했다고 해도 ‘제2의 이성계’ ‘제2의 수양대군’이 되었을 뿐이다.”

돌아가신 함석헌 선생의 혹평이다.

북한 사학계에서 영웅으로 떠받들고 있는 홍경래. 그의 봉기는 중세의 질곡을 떨쳐버리고자 한 반봉건 투쟁이었을까. 동학혁명으로 이어지는 농민전쟁의 씨를 뿌린 것이었을까.

홍경래의 난은 다른 민란과는 확연히 달랐다. 10년 세월의 치밀한 준비를 거쳐 세력을 규합하고 자금을 모으고 병력을 양성했다.

서자 출신의 상인이자 식자 우군칙, 명망 있는 양반가의 선비 김사용 김창시, 역노(驛奴) 출신으로 무과에 급제한 부호 이희저, 평민 장사 홍총각, 몰락한 향족 이제초…. 홍경래는 여러 계층의 인물들을 두루 포섭했다.

그러나 이들은 의기(義氣)는 투합하였으나 자발적으로 세(勢)를 불려나갈 ‘민중적 지향점’은 없었다. 혹독하게 말하자면 그들을 묶어놓은 것은 개인사적인 분노와 좌절된 욕망이었다. 이념적 구심점은 부재했다.

홍경래의 유일한 사상적 기반이었던 풍수(風水). 그것은 공간적으로는 관서(關西)라는 지역주의의 한계를 노출했고 시간적으로는 중세의 봉건 이데올로기에 갇혀 있었다. 당시의 식자층에겐 비켜갈 수 없는 시대의 덫이기도 했다.

거사 당시 돌린 격문(檄文)을 보자. “조정에서는 서북 땅을 버림이 마치 더러운 흙과 같았다. 권문(權門)의 노비들조차 서쪽 땅 사람들을 보면 평안도 놈이라 일컬었다. 서쪽 땅에 있는 자 어찌 억울하고 원통치 않겠는가….”

극렬한 지역주의는 일시에 평안도 농민들의 공분을 폭발시켰으나 동시에 다른 지역으로부터 고립을 자초했다. 거사 뒤 불같은 기세가 불과 나흘 만에 수그러든 것은 이 때문이다.

불만의 결집만으로는 ‘새날’을 밝힐 수는 없었다.

배영순 교수(영남대)는 이렇게 정리한다. “조선 왕조 500년의 멍에를 벗어던진 그 의기는 장하였다. 용맹도 있었다. 그러나 사상이 없었다. 민중의 가슴 속에 잠자고 있는 호랑이의 혼(魂)을 일깨울 신앙이 없었다.”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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