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강정훈/‘희생적 결단’ vs ‘배신자’

  • 입력 2003년 12월 15일 18시 26분


코멘트
‘여러 날 고민과 불면의 밤’을 보낸 김혁규(金爀珪) 경남도지사가 15일 한나라당 탈당과 지사직 사임을 선언했다. 그러나 이날 기자회견장은 김 지사의 ‘새 출발’을 축하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김 지사는 열린우리당 경남창당준비위원장인 김두관(金斗官) 전 행정자치부 장관과 전현직 시장 군수 등을 배석시키고 모양새를 갖추려 했으나 그의 ‘변신’에 격분한 한나라당 관계자들이 들이닥치면서 회견장은 아수라장이 됐다.

그가 ‘도민께 드리는 글’을 읽고 기자들의 질문을 받으려는 순간 권영상(權永詳) 한나라당 경남도지부 부위원장 등 30여명이 ‘배신자 김혁규는 경남을 떠나라’는 등의 구호가 적힌 피켓을 들고 회견장에 들이닥쳐 격렬하게 항의했다.

이 때문에 기자들과의 일문일답은 뒤늦게 김 지사의 집무실에서 진행됐다. 그는 ‘희생적 결단’ ‘국가 발전을 위한 대의’ 등 수사(修辭)를 동원해 자신의 선택을 정당화했다.

김 지사는 “국민이 선택한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이 성공하도록 돕고, 지역구도 타파를 위한 것일 뿐 어떤 자리도 보장받지 않았다”면서 열린우리당이나 정권과의 ‘거래설’을 거듭 부인했다. 그는 “입당 시기 등에 대해 열린우리당과 사전 협의조차 없었다”고 덧붙였다. 평소 계산이 치밀한 김 지사의 스타일을 감안하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대목이었다.

열린우리당과 김 지사가 ‘사후 보장’ 문제를 둘러싸고 오랫동안 줄다리기를 해 왔다는 사실은 이미 지역 정가에 파다하게 퍼져 있다. 김 지사의 이날 발언은 당장 쏟아지는 비난을 피하기 위한 제스처로 해석됐다.

현재로선 김 지사의 ‘중대 결단’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도민은 별로 없어 보인다. 한나라당의 공세도 쉽게 사그라지지 않을 분위기다.

한나라당 경남도지부는 “일신의 영달만을 위해 자신을 키워 주고 밀어 준 한나라당과 경남도민을 우롱한 김혁규씨는 죗값을 치를 것”이라는 성명을 냈다. 한나라당 소속 일부 도의원과 권 부위원장 등은 단식 농성에 들어갔다.

김 지사는 1993년 12월 일천한 공직 경력에도 불구하고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의 파격 인사로 경남도지사에 임명됐고, 이후 특유의 정치력을 발휘하며 10년간 재임했다.

과연 김 지사는 그의 주장대로 ‘새로운 정치문화 창출’의 길로 나선 것일까. 60대 중반인 그가 자신의 ‘정치적 아버지’라고 말해 온 김 전 대통령의 강력한 만류까지 뿌리치고, 그가 틈만 나면 깎아내리는 노 대통령의 품에 깃든 속셈은 무엇일까.

강정훈 사회1부 기자 manman@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